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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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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아가는 또 다른 ‘실비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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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서사 다룬 뮤지컬 <실비아, 살다> 보니

한겨레

뮤지컬 <실비아, 살다>.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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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이 켜지면 두명의 여인이 기차를 타고 있다. 한 여인은 기차에서 내리기 위해 비상 정차를 한다. 실비아 플라스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8살 때 겪은 아버지 죽음의 충격으로 9살 때 첫 자살 시도를 하고, 21살에 또 한번, 31살에 마지막 시도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 뒤에야 예술성을 평가받아 사후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일한 작가가 됐다.

뮤지컬은 실비아가 기차에서 내리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배경은 1956년 영국 런던, 이곳에서 시인 테드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에 이른다.

테드는 남성·남편·아버지에 앞서 ‘시인 테드 휴즈’로 불리지만, 실비아는 여성·아내·어머니 다음에 ‘시를 취미로 쓰는 여자’로 평가받는다. 테드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시인이 됐지만, 실비아는 타자를 치고 커피를 내리고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 역시 실비아의 몫이었다. 그나마 어렵사리 시를 쓰면, “여성 시인의 시답지 않다” “시가 아름답지 않다”는 비평을 들어야 했다. 실비아는 신경증에 걸려 점점 쇠약해지고 지쳐간다. 실비아는 “나의 실패가, 테드의 성공이야”라며 절규한다.

이렇게 힘들 때마다 실비아를 위로하는 사람이 있다. 빅토리아 루카스다. 실비아가 힘들어할 때 얘기를 들어주고, 실비아를 지치게 하는 말을 하는 이들을 향해 “뭔 개소리냐”며 함께 욕해준다. 실비아가 세번째 자살 시도를 할 때도 빅토리아는 그를 설득한다.

뮤지컬에서 빅토리아 루카스는 ‘절친’으로 나오지만, 사실 그는 실비아 플라스의 필명이다. 실비아 플라스는 이 필명으로 마지막 작품 <벨 자>를 출판했다. 작은 유리종을 뜻하는 ‘벨 자’는 시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엄마와 딸, 아내라는 틀에 갇혀 살 것을 강요하는 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뮤지컬 <실비아, 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또 다른 ‘실비아들’에게 왜 죽어야 하는지가 아니라 왜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나’를 증명해야 하는 또 다른 ‘실비아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메시지인 셈이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와 문장을 활용한 대사와 노랫말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클래식과 아프리카 전통음악 등을 바탕으로 한 다채로운 뮤지컬 넘버는 강렬하게 다가온다.

뮤지컬은 프롤로그 기차 장면으로 시작해 에필로그 기차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실비아 플라스의 소설 <메리 벤투라와 아홉번째 왕국>에 나오는 기차 여행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삶이라는 기차 여행에서 목적지까지 사회적인 강요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선택해 도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암시한다.

다음달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티오엠(TOM) 2관에서 볼 수 있다.

덧) 뮤지컬이 시작하기 전 배우 두명이 나와 아이폰 이용자에게 휴대전화 전원을 꼭 꺼달라고 요청한다. 공연 도중 ‘실비아’라는 이름을 아이폰 음성 인식 서비스 ‘시리’(Siri)를 부르는 “시리야”로 오인하고 반응하기 때문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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