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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이슈 물가와 GDP

"못 잡겠다, 물가"... 논란의 관치, 불굴의 긴축에도 악재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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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정부 시장 개입·한은 '줄타기' 배경
중국 리오프닝 등 인플레 자극 변수 줄줄이
'2% 목표 재검토'론도... "신뢰 잃지 말아야"
한국일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9일 '상생금융 확대를 위한 금융소비자 현장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 내 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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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물가(物價)가 있었다. 무리수와 망설임의 근원이었다. 시장과 자유를 기치로 출범한 정부가 관치 논란을 불사하며 노골적으로 가격에 개입해 사면초가를 자초하는 것이나, 시중 돈이 줄고 가계 빚이 불면 경기가 꺼진다는 이치쯤 익숙한 중앙은행이 초유의 속도와 불굴의 의지로 금리를 끌어올린 것 모두 언제 정상화할지 모르는 물가 탓이다.

꺼지는 경기, 속수무책 전에


“오늘 KB(국민은행)가 발표한 것처럼 개별 은행이 (이자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다.”

KB국민은행이 가계대출 상품 금리를 인하하겠다고 약속한 9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은행의 결정을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금리로 차주들의 이자 부담이 가중되고 있는 만큼 은행들도 상생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면서다. 소비 여력을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고금리는 효과가 고물가와 마찬가지다.

금융당국뿐 아니다. 경쟁당국인 공정거래위원회도 함께 나섰다. 지난달 27일부터 4일간 5대 시중은행(KB국민ㆍ신한ㆍ하나ㆍ우리ㆍNH농협)과 IBK기업은행 등 6개 은행을 상대로 대출 금리ㆍ수수료 담합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현장 조사를 벌였다. 올 들어 정부는 얼마간 수익이 희생되더라도 ‘예대 마진(예금ㆍ대출 금리 차이)’을 줄여 국민과 고통을 분담해 줄 것을 줄곧 은행에 요구해 왔다. 연말 ‘성과급 잔치’ 사실이 알려져 잔뜩 위축된 은행이 버틸 도리가 없었다.

최근 소줏값 동결 과정도 유사했다. 가격 인상 기미가 보이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세금 인상을 핑계 삼아 가격을 올리려는 움직임이 주류업계에 보인다"는 일갈로 ‘부도덕 낙인’을 찍어 명분을 만든 뒤, 국세청이 업체들에 전화를 돌려 항복을 받아 냈다.

물론 은행에 실망한 여론은 호응했다. 구미 선진국처럼 전문성을 살린 투자 등에 힘쓰기보다 예대 마진에 의존해 편하게 돈을 벌려는 국내 은행권의 행태가 차제에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동조 의견도 학계에 적지 않았다. 하지만 주류는 비판이었다. 보혁을 막론했다. 정권 지지 기반인 기업 측에서는 ‘자유시장경제 표방 정체성이 거짓이었냐’는 볼멘소리가 커졌고, 시장 실패에 주목해 온 반대 진영은 ‘의도가 불순하다’거나 ‘오락가락 졸속’이라고 핀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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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물가 상승률 및 기준금리 추이. 그래픽=신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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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반 만인 지난달 중단하기는 했지만, 올 1월까지 한국은행은 일곱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올렸고, 사상 처음이었다. 이례적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었던 만큼, 해당 기간 금리 인상 폭(3.00%포인트)도 전례 없이 가팔랐다.

동결은 진퇴양난의 산물이었다. 경기 방어는 정부 부처가 할 일이지만, 긴축도 경기 하강 요인인 만큼 한은이 좌시할 수만은 없다. 정부가 아무리 대출 금리를 눌러 가계부채를 관리하고 싶어도 한은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한 한계가 뚜렷하다. 그래도 여전히 한은은 물가가 우선이다. 이창용 총재가 속도 조절용 동결을 긴축 종료로 오해하지 말라고 강조한 배경이다.

인플레이션은 위험하다. “월급 빼고 다 올랐다”는 고물가 원성이 이미 자자하다. 고금리도 만만치 않다. 작년 가계의 경직성 비(非)소비 지출 항목 중 전년 대비 증가 폭이 가장 컸던 게 이자 비용이었다. 집값이 떨어지고 대출 이자는 오르는 통에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빚을 낸)족’은 샌드위치 신세다. 이 와중에 경기 침체가 오면 고용까지 무너진다.

이런 총체적 민생고 해결의 출발점이 바로 물가 안정이다. 실기하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을 속수무책 맞아야 할 수도 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이기려면 ‘물가와의 전쟁’에 일단 총력을 쏟아야 하는 게 여권의 처지다.

분명 떨어진다? 위험한 장담


문제는 여전히 악재가 수두룩한 첩첩산중이라는 점이다. 일단 명목상 둔화한 물가 상승률을 액면대로 믿기는 어렵다. 10개월 만에 4%대로 복귀한 지난달 물가 상승률에는 거품이 끼어 있다. 작년 기형적으로 폭등했던 에너지 가격이 정상화하며 기저 효과가 발생했다. 가공식품(10.4%)은 전월(10.3%)보다 더 올랐고, 외식비 상승률(7.5%)도 아직 높다. 체감 물가가 고공행진 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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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한국은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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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정부가 미봉책으로 동결해 둔 전기ㆍ가스요금 등 공공요금 인상이 대기 중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의 통화긴축(금리 인상) 지속과 중국의 경제활동 재개(리오프닝) 등 외부 악재도 줄줄이다. 연준이 긴축 기조를 바꾸지 않을 경우 원ㆍ달러 환율이 상승하고 환율이 오르면 수입 물가도 자동으로 올라간다. 중국 경제가 살면 글로벌 원자재 수요가 확대돼 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

물가는 잡힐 가망이 없고 긴축의 악영향만 두드러지다 보니 2%대 물가 상승률 목표를 재검토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정치권에서 나오지만, 통제 포기 신호로 읽힐 수 있는 만큼 수용하기 힘들다는 게 한은과 정부 입장이다. 강삼모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측이 한두 달은 기다리며 한미 금리 차에 따른 환율이나 물가 추이를 지켜볼 것”이라고 내다봤다. 당장 별수 없다는 것이다.

워낙 여건이 불확실한 만큼 한은의 ‘줄타기’도, 정부의 장담도 금물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의 금리 동결도, 정부의 ‘상고하저(연말로 갈수록 물가가 낮아짐)’ 낙관론도 물가가 예상 경로로 가지 않으면 위기 때 가장 중요한 신뢰 자산을 잃게 된다”며 “데이터에 의존하겠다는 식의 신중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세종=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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