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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회복 위해 다시 뭉친 이태원 상인들… “상인 때문에 죽었다”는 2차 가해에 속앓이 [이태원 참사 1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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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딛고 다시 뭉치는 사람들

주말 무보수로 97개팀 참여 음악 축제

거주민·예술인 뜻모아 수익 전액 기부

사고 초반 비난 대상됐던 지역상인들

생계 이어가려 상권 살리기 점차 힘내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그날 이후 적막과 슬픔만이 가득했던 이태원 거리가 지난 4일 모처럼 활기를 띄었다. 이태원 압사 참사 100일을 맞는 주말(2월 4, 5일) 이태원역 일대 9개 주점과 클럽에서 ‘렛 데어 비 러브(사랑이 자리 잡기를), 이태원!’이라는 추모공연이 열리면서다. 이 행사는 이태원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해 상인과 거주민이 주축이 된 비영리단체(팀 이태원)와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개최했다.

5일 주최측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영국 맨체스터 경기장 테러(2017년)’ 직후 열린 자선공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관객이 티켓 한장으로 이태원 곳곳의 주점과 공연장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음악 축제를 즐기는 방식이다. 수익 전액이 기부되고, 무보수로 이뤄지는 공연에 브로콜리너마저, 이날치, 말로밴드, 오지은 등 유명 가수들을 포함해 총 97팀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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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100일을 맞아 열린 추모공연에 한 아티스트 팀이 참여하고 있다. 팀이태원 포토그래퍼 김한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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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연으로 조심스럽게 ‘상권 살리기’ 시동

공연은 전날 오후 2시반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에 차려진 매표소 앞에서 마칭밴드 ‘쏘왓놀라밴드’의 연주로 막이 올랐다. 행진을 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밴드와 뒤따르는 관객들은 참사가 발생한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함께 걸었다. 추모 글귀가 적힌 포스트잇이 가득한 골목에 시끌벅적한 악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주변을 걷던 시민들도 발길을 멈추고, 골목을 통과하는 행렬을 구경했다. 밴드 리더인 조운(29)씨는 “이태원은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소중한 장소”라며 “추모 공연은 처음이라 감정이 북받쳐올랐다. 우리의 연주로 위로와 사랑이 전달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토요일 밤이 무르익어 가면서 9개 공연장은 모두 만석이 됐고, 스탠딩 콘서트에 온듯 열기가 뜨거웠다. 사람이 너무 몰리자 관객들의 추가 입장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날 공연장을 찾은 이들은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었다. 이가은(23·여)씨는 “참사 피해자 중 내 또래가 많아 이태원에 놀러오기 미안했다”며 “이번 공연을 계기로 이태원에 오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원 상인들은 하루아침에 황폐화된 지역 분위기를 회복하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희생자들의 49재 이후 ‘상권 살리기’를 조심스럽게 추진 중이다. 그러나 사고 초반부터 온라인을 중심으로 계속된 상인을 향한 비난에 상처받고 많이 위축되기도 했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많은 희생자가 나온 곳에서 술과 음식을 판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걱정되는 데다, 참사 당일 상인들이 희생자들을 나몰라라 했다는 식의 유언비어까지 나돌아 속앓이를 해야 했다.

참사 당시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는 상인 권구민씨는 “오후 10시반쯤 밖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는 것을 보고 돕기 시작했다. 가게 직원들이 100m 넘게 시신을 날랐고, 트라우마로 2주 동안 외출을 못 했을 정도”라며 “대체 왜 우리가 사람들을 죽였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한탄했다.

이태원에서 20년째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최모씨는 “전혀 이태원에 와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사람 죽은 데서 놀고 있네’라는 악성 댓글을 달면 방문하려던 손님들도 눈치를 보고 멈칫하게 된다”며 “추모 슬로건을 만들면서 다가가려고 해도 한쪽에서 ‘왜 추모하냐’며 욕을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최씨는 “(언론과 인터뷰만 해도) 유튜버들에게 시달려 피곤하고, 가게에 악영향을 미칠까 우려된다”며 취재진에 익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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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적한 거리가 추모 공연이 진행되며 저녁이 되자 인파가 약간 증가한 모습이다. 팀이태원 포토그래퍼 김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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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인 행사·대출 금리 지원보다 상권 회복이 핵심

상인들은 현재 이태원을 지원하는 정부의 방침이 다소 소극적이라고 아쉬워했다. 제로페이 할인이나 저금리 대출 등은 상인 입장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중론이다. 의류 가게를 하는 30대 상인 A씨는 “이태원에서는 싸움만 벌어지고 있는데, 정부는 이벤트나 홍보를 해주거나 골목을 치워주지도 않는다”며 “대중의 관심이 식어가니까 더 나몰라라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안으로 지원금, 세금 감면, 거리 치우기 등 3가지를 요청했다.

이태원에서 요식업 장사한 지 3년이 됐다는 40대 후반 B씨는 참사 이후 이태원 광장에 “참사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검은 글씨 현수막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많아졌다”며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빨리 정리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라고 밝혔다. B씨 역시 “상권 자체가 회복되고, 이태원이 전체적으로 살아나야 한다”며 “대출이자를 싸게 해 주는 등의 금전 지원은 효과적인 지원이 아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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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한적한 거리가 추모 공연이 진행되며 저녁이 되자 인파가 약간 증가한 모습이다. 팀이태원 포토그래퍼 김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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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난 골목에 인접한 가게에서 11년간 의류·잡화를 판매해 온 남인석(82)씨도 “현장은 숨 넘어가기 직전이다.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며 “이태원을 그나마 활성화할 수 있는 생명이 붙어 있을 때 숨을 쉬게 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래의 이태원 모습을 되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이태원 상인 최모씨는 “저희가 추모와 애도를 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고 나아지겠느냐”며 “길게는 오는 3∼4월까지 뭔가 계속 기획하며 이태원을 되살리는 것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남씨는 “생동감과 활력을 느끼러 오는 이태원 본연의 문화를 살릴 수 있는 밝은 분위기의 추모 공원 등을 만들고, 보다 실질적인 보상안을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지혜·김선영·박유빈·조희연·김나현·안경준·유경민·윤솔·윤준호·이규희·이민경·이예림·채명준·최우석·김계범·이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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