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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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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벗’ 임보라 목사 별세 소식에 인권·진보교계 ‘비통’···“혐오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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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3년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목사가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centing@kyunghyang.com


5일 오전 9시30분 서울 강동경희대병원 장례식장. 전날 밤 임보라 목사의 급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섬돌향린교회 교인 몇몇이 지하 2층 22호 빈소를 채웠다. 각계 시민사회단체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기 전이라 빈소는 차분하고 고요했다. 교인들은 막 비닐 덮개를 깔기 시작한 테이블 한쪽에 모여 앉아 말없이 음식을 넘겼다.

“성 소수자로 성공하는 모습 보여드리려 했는데….”

“오래 살아요, 살아남는 게 성공이지.”

울먹이며 비통해하는 사람과 그를 다독이는 이도 보였다.

성소수자 권리 보호에 앞장서 온 임보라 섬돌향린교회 담임목사의 별세 소식이 지난 4일 알려졌다. 1968년생인 임 목사는 한신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93년 강남향린교회 전도사를 맡으며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보수 개신교가 반대하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앞장서 왔으며 2018년 일부 보수 성향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그는 ‘성소수자의 벗’이 되어 평생을 인권운동에 바쳤으나 가는 길마저 혐오와 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날 빈소에서 만난 섬돌향린교회 관계자는 “부고가 나간 이후 언론 기사 등에 강성댓글이 너무 많이 달리고 있다”면서 “내부에서는 언론 대응에 일절 응하지 않기로 논의했다”고 말했다.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임 목사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은 그를 추모하는 이들의 글로 채워졌다.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으며 죽으려던 중 목사님을 만났다” “당신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 있다” “약자들의 곁에서 불의한 자들에 맞서 싸우신 모습을 따르겠다” 등 그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의 추모글이 빼곡했다. 모바일 부고장에도 “혐오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라”는 조사(弔辭)가 이어졌다.

임 목사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에 시민사회단체와 진보 개신교 단체 관계자들도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종걸 친구사이 사무국장은 “임 목사는 개신교가 말하는 ‘사랑’의 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분이었다”면서 “각종 발언장에서 교계 목소리가 필요할 때마다 용기를 내줬다”고 말했다. 이어 “성소수자 개신교인 중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주저 없이 임 목사를 얘기했다”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큰 부담을 줬던 것인지 미안한 마음도 든다”고 했다.

대한성공회 용산 나눔의집 원장 사제인 자캐오 신부는 임 목사를 성소수자 운동의 ‘이정표’로 기억했다. 자캐오 신부는 “임 목사는 교회 안팎에서 언저리 취급을 받는 사람들, 그러나 실제로는 신이 가장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편’이었다”면서 “나는 늘 그의 등 뒤를 바라보며 반 걸음 뒤에서 걷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빈자리를 채울 수 없겠으나 생전 가르침대로 우리는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

2010년 임 목사와 함께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 책을 발간했던 한채윤 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도 “임 목사는 성 소수자를 위해 선두에 섰던 사람”이라고 했다. 한 이사는 “2007년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당시 개신교 쪽에서 조직적으로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할 때 임 목사는 가장 적극적으로 성 소수자 인권을 외치는 성직자였다”면서 “굉장히 부드러운 어조에 분노를 꾹꾹 눌러 얘기하곤 했다”고 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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