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범 기자 |
‘신냉전’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21세기 세계사의 축소판. 유럽 대륙의 데탕트를 깨뜨리고 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상징하는 현실이다. 양측 사상자는 그새 20만명을 넘었고 피란민은 1000만명을 헤아린다.
이 비극에 끝은 있는가. 해를 넘겨 장기전 조짐마저 보이는 이 전쟁을 현지 사람들은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전쟁 발발 직후 우크라이나·폴란드 접경지역 피란 현장을 찾았던 중앙일보가 개전 1년 시점에서 우크라이나 속으로 들어가 전쟁의 참상을 전한다.
곳곳이 삼엄한 검문소였다. 지난 1월 3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벗어나 북부 벨라루스 접경지대로 향하는 길목마다 소총을 든 우크라이나 군 관계자가 기자를 막아섰다. 기자 신분증(프레스 카드)과 취재 목적을 밝히자 그제서야 통행이 허용됐다. 긴장감은 벨라루스가 가까워질수록 고조됐다. 지난해 2월24일 우크라이나 삼면이 포성에 휩싸였을 때 북쪽에서 내려온 러시아군에 가장 먼저 짓밟힌 지역임을 실감케 했다.
중앙일보는 벨라루스를 거쳐 우크라이나 키이우로 남하한 러시아군의 1년 전 침공 루트를 거슬러 오르며 전쟁이 할퀸 상흔을 돌아봤다. 기자는 키이우에서 출발해 디미르와 카추잔카, 이반키우를 거쳐 프리비르스크까지 접근했다. 프리비르스크는 벨라루스 국경과 직선거리로 불과 40㎞, 원전사고로 유명한 체르노빌 지역과는 약 20㎞ 밖에 떨어지지 않은 접경 도시다.
지난 30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북부 카추잔카 마을 인근에 위치한 상점에서 만난 알렉산드르(64)는 ″러시아군이 상점을 털어간 이후 아직도 그 빚을 갚고 있다″면서도 ″결국 러시아의 젊은 군인들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거짓말에 현혹된 것 아니겠나″고 말했다. 카추잔카=김홍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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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루트 따라가 보니… 곳곳에 새겨진 ‘비극’
전쟁 발발 1년이 다 돼가지만, 주민들의 마음속 시계는 여전히 지난해 2월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키이우 도심에서 북쪽으로 70㎞쯤 떨어진 카추잔카 인근의 한 마을. 60대 여성 타티아나는 개전 상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
30일(현지시간) 만난 타티아나(64)는 ″지난 침공 때는 어떻게든 피해갔지만, 러시아가 벨라루스군까지 동원해 다시 침공해 내려올 수 있다는 말이 나와 걱정″이라고 했다. 카추잔카=김홍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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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점을 운영하는 알렉산드르(64)는 전쟁 발발 후 피난을 떠났다가 한 달여 만에 가게를 다시 찾았을 때 펼쳐진 장면을 잊지 못한다. 러시아군이 휩쓸고 간 진열대는 남김 없이 텅 빈 상태였다. 그는 한국 돈으로 1300만원 상당의 물품을 다시 채우기 위해 은행에서 빚을 져야 했지만 언제 이를 다 갚을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다고 했다.
러시아의 침공 경로 상에 있던 작은 다리들이 러시아군의 후퇴 이후 재건되고 있다. 현지 주민들은 이 다리들이 대부분 러시아군이 후퇴하면서 부수고 간 것이라고 했다. 김홍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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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키우와 프리비르스크 등에서도 비슷한 사연은 이어졌다. 특히 이곳 시민들은 인접한 벨라루스가 러시아군이 침략하는 길을 내어준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반키우에서 만난 바실리(65)는 “양국 국경 지대 주민들은 예전부터 교류가 많았다”며 “나도 1970년대에는 벨라루스에서 건설노동자로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벨라루스가 러시아군에게 길을 내준 건 너무 충격”이라며 “러시아에 푸틴(대통령), 벨라루스에 루카셴코(대통령) 같은 독재자가 남아 있는 한 좋은 날이 오긴 어렵다”고 한탄했다.
프리피야트강, 교류의 길에서 피의 길로 돌변
3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북부 이반키우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타밀라(52)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에 소속된 아조우 연대 군인들 명단을 들고 그들과 그 가족을 찾았다″며 ″러시아군이 이렇게 까지 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반키우=김홍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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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련으로 함께 묶였던 이들 나라를 잇는 것은 단지 역사뿐이 아니다. 우크라이나 서부 볼린주에서 시작돼 벨라루스로도 이어지는 총 길이 775㎞의 프리피야트 강이 대표적이다. 9세기 무렵 바이킹으로 유명한 북게르만족 바랑기아인이 이 강을 따라 내려와 '키이우 루시(키예프 루스) 공국'을 세운 이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여기에 러시아까지 이곳을 자신들의 뿌리로 여긴다.
한뿌리라던 그들 사이에 ‘교류 협력의 길’로 통했던 프리피야트 강은 그러나 ‘피로 물든 전쟁의 길’이 되고 말았다. 침공이 임박했던 지난해 2월 중순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6㎞ 남짓 떨어진 프리피야트강 한 지점에 전술 부교가 설치된 것이 미국 위성사진업체 막사앤드플래닛에 포착됐다. 이어 2월 24일 이 부교를 통해 수십대의 러시아 군용차량이 이동하는 모습이 잡혔다. 역사의 강이 침공 루트가 됐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
프리피야트강 주변에서 만난 주민들 대부분은 옛 소련 시절 벨라루스 주민들과 지낸 좋은 경험을 기억하면서도 이제는 끝이라고 했다. 70대 여성 스베틀라나는 “헬리콥터 소리와 총 소리, 지뢰가 설치된 곳이라며 빨리 나오라던 사람들, 그 혼란을 생각하면 예전에 형제 국가 같았던 과거는 이제 끝났다. 눈 감는 그날까지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은 문구점을 운영하는 타밀라(52)도 “처음에 뉴스로 침공 사실은 알았지만 대피를 하지 않았던 건 우리를 이렇게 짐승처럼 대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라며 “결국 문제는 푸틴이다. 푸틴은 전쟁을 할 명분만 찾는다. 조지아에서, 몰도바에서 한 전쟁은 왜 일어난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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꿋꿋이 버티는 시민들…“푸틴 욕하고 싶을 뿐”
지난 3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에서 아침 운동을 하는 시민의 모습. 현지에서 만난 시민들은 단전과 공습 경보 등에도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키이우=김홍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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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돌려 침공 루트를 따라 찾아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여전히 이곳에선 툭하면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시민들은 운행을 멈추는 지하철과 공영버스에서 내리는 게 일상이다. 러시아군이 지난해 말부터 발전소 등을 집중공격하면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전기가 끊긴다. 자체 발전기를 갖춰 정전에도 엘리베이터에 갇힐 일 없는 건물이 ‘생활 정보’로 공유된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에 갇혀 살진 않는다. 시내에서 만난 보그다나(25)는 “우리 이야기를 기사로 쓰게 된다면 반드시 알려 달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고 화가 났다는 사실을…”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해 10월 미사일 폭격으로 무너진 키이우 도심의 한 호텔 바로 옆에 아파트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 건설노동자 빅토르(54)는 “일상을 지키고 일을 하면서 슬픔과 스트레스를 잊는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키이우 시내 호텔 바로 옆에서 신축 아파트에 들어갈 배관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만난 건설 노동자 빅토르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지하철로 뛰어가야 하지만, 일로써 현재의 어려움을 잊고 있다″고 했다. 키이우=김홍범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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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1시면 통행금지가 내려지지만, 클럽과 레스토랑 등 일부 가게들은 영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게 주인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현지 서점가에서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이자 이 대학 우크라이나연구소장인 세르히 플로히가 쓴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가 베스트셀러다. 우크라이나 민족사 등을 다룬 책이다. 기자가 찾은 한 서점에는 이 책 옆에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의 저서가 놓여 있었다. 마치 처칠처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 전쟁에서 우크라이나를 승리로 이끌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우크라이나 르포 2회는 2월 2일에 이어집니다.
■ '러·우크라 전쟁 1년' 디지털 스페셜 만나보세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맞아 중앙일보가 2월 1일 디지털 아카이브 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비극에 끝은 있는지,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의 맞대응 등 지난 1년의 기록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아카이브 보기 ☞ https://www.joongang.co.kr/digitalspecial/479
키이우=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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