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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여고동창 윤정희를 떠나보내며-‘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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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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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잘 도착했어? 가는 길은 어떻든? 말 한 마디 못 나누고 헤어지는 게 아쉬워 이렇게 너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으로 작별인사를 한다.

너와 나는 전남여고를 졸업했고, 고3 때 같은 반이었어. 3반 ‘맘보반’. 담임선생님의 특성을 따라 반의 이름이 붙었는데 1반은 ‘의뭉반’, 2반은 ‘조백반’, 그리고 4반은 ‘사삭반’. 어이없도록 깔깔거리며 청춘의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우리는 졸업과 동시에 각자의 길로 흩어져 갔어. 꽤 많은 친구들이 서울로 올라오고…. 몇 년 후 너는 ‘청춘극장’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데뷔를 했어. 친구들과는 삶의 카테고리가 달라진 후에도 너는 친구들 모임에도 여행에도 드물게나마 동반하였고, 친구들의 짓궂은 질문에 성호를 그으며 대꾸하던 모습, 그렇게 우리의 젊음이 지나고….

너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 후, 너에 관한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어. 초등학교 때 목욕탕에서 너를 봤는데 너의 피부가 유난히 빛나고, 너의 엄마가 너를 씻기는데 마치 값비싼 도자기를 다루듯 하더라는 것, 고교시절 학예회 때 율동할 아이들 화장을 해주던 선생님이 너의 턱을 들어 올리면서 “너는 손볼 데가 한 군데도 없구나”했다는 얘기도.

너는 조용하고 들레지(야단스럽게 떠들다) 않았기에 친구들은 네가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그렇게 놀라운 모습이 되어 나타날 줄 전혀 몰랐어. 배우생활 하는 바쁜 중에 너는 대학원에 적을 두었고, 논문 쓰는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어. 프랑스로 가기 전 불어 공부에 열을 올리기도 했고, 프랑스에 가서도 파리1대학인지 2대학에서 영화에 관한 공부를 한다고 하였어. 너는 끊임없이 배움을 이어갔고, 항상 영화를 하고 싶어 했고, 실패작이든 성공작이든 자주 경험할 환경이 아님을 안타까워했어. 한동안 연말의 영화상 심사위원에 꾸준히 참여하는 것으로 배우로서의 행보를 이어 갔고, 직접 영화에 임하지 못하던 열정은 남편의 연주에 쏟아 붓는 것 같았어. 매니저 같았다고나 할까? 식상한 얘기 같다만 너는 참 온유했고 소박했어. 어떻게 화려할 것 같은 직업의 사람으로 손가락에 번쩍이는 반지 하나, 몸에 값비싼 밍크코트 하나, 집에 화려한 장식장 하나 없이 살 수 있었는지….

너와의 마지막 통화는 2016년 초가을 늦은 밤이었어. 바로 다음 날 있을 너희의 연주회 초대를 한다는 것이었고 대화 끝에 너는 또 하나의 빅 이벤트를 이야기해 주었어.

“우리 내년에 베토벤 사이클 또 해. 그때도 인바이트(invite)할게.” 하는 것이었어. 너는 항상 “내가 또 인바이트 할게”라는 표현을 하였어.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내리 7회에 걸쳐 연주하는 대장정을 하였고, 10년 만에 그 사이클을 또 한다는 것이었어. 그렇지만 초대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 했어. 몇 년 후 네 남편을 통해, 영화배우 윤정희는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어. 너는 더 이상 너의 전화번호부를 뒤져 친지의 연락처를 찾아내고 전화를 돌려 초대하는 절차를 수행해낼 수 없게 되었던 거야. 그러니까 나와의 마지막 통화는 증세가 심해지기 직전, 무의식 속에서 문득 하나 던져진 마지막 불꽃 아니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치매란, 뇌라고 하는 육체의 한 부분의 문제가 아니고, 늙음의 삶이 어이없도록 망가져 버리는 것을 차마 눈뜨고 맞을 수 없어 우리의 마음이 뇌의 문을 철커덕 닫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마 그쪽이 더 맞을 거야.

영화 ‘시(2010)’에 나오는 ‘아녜스의 노래’를 읊어본다. 영화에서는 네가 동네 문화원에서 ‘시’ 강좌를 듣지. 이창동 감독은, 영화 속 주인공의 운명이 그 역을 맡은 자연인 손미자(윤정희의 본명)에게 현실이 될 줄 알았다면 주인공이 멋지게 털고 일어나 ‘시 짓는 할머니’로 살도록 시나리오를 고치지 않았을까?

<아녜스의 노래>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중략)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서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임자 前 ‘음악동아’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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