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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장덕진 칼럼] 횡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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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비 고지서를 받아보니 듣던 대로 휘청한다. 작년 같은 달보다 족히 30만원은 올랐는데, 며칠 전 생각지도 않게 연말정산 폭탄을 맞은 뒤끝이라 이달 월급은 허공으로 사라진 기분이다. 나보다 더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더 큰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다른 나라들이 다 시행하고 있는 횡재세를 제도적으로 확실하게 도입”해 난방비 지원에 쓰자고 제안했고, 야당은 법안을 발의하거나 혹은 정유사들에 기금 출연 요청을 한다고 한다. 누가 나 대신 난방비 내주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이게 맞는 건가 좀 따져볼 필요는 있겠다.

경향신문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정유사와 여당의 반론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체 유전에서 원유를 생산하는 메이저 석유회사들과 달리 한국 정유사들은 원유를 구입해 정제만 하기 때문에 원가가 곧 시장가격이라는 반론이다. 다른 하나는 기름값 올랐다고 정유회사에 횡재세 부과하면 반도체 가격 오르면 반도체 회사에, 코로나19로 마스크 가격 오르면 마스크 회사에 횡재세를 매겨야 하느냐는 반론이다. 둘 다 일리는 있는데 그것만으론 부족한 느낌이다. “다른 나라들이 다 시행하고” 있다지 않는가.

얼핏 보면 유럽은 온통 횡재세를 도입한 것처럼 보인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루마니아는 이미 일종의 횡재세를 도입했고, 체코와 폴란드는 법안이 나와 있는 상태이며, 프랑스, 벨기에, 아일랜드, 독일, 네덜란드, 핀란드는 검토 중이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위헌 논란에 휩싸여 있고, 세수 110억유로라는 예상과 달리 20억유로밖에 걷지 못했다. 폴란드는 기업들의 줄도산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고, 스페인은 은행에 횡재세를 매겼다가 유럽중앙은행으로부터 은행의 지불능력을 훼손했다며 혼쭐이 나고 정책을 다시 만드는 중이다.

영국은 작년 5월 횡재세를 도입하면서 세율 25%에 2025년까지 적용될 것이라고 했다. 불과 석 달 후인 8월에는 말을 바꿔 세율 35%에 2028년까지라고 발표했다. 이 말만 들으면 영국이 대대적으로 횡재세를 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디테일을 보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우선 과세 대상은 영국 땅에서 석유와 가스를 채취함으로써 얻어진 이익이다. 석유를 정제하거나 주유소에서 판매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은 횡재세와는 무관하다. 노동당은 횡재세가 영국 땅에서 채취된 화석연료에 대해서도 1파운드당 91페니까지 조세감면을 해준다고 반발하고 있다. 영국 최대 석유회사는 셸과 BP이다. BBC 보도에 따르면 셸은 2022년 횡재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셸의 석유 채취는 전부 북해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영국 땅에서 채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3년에는 “약간은(some)” 내게 될 것 같다고 한다. BP는 2022년에 8억달러(9600억원)를 냈으니 적은 돈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회사는 2015년부터 횡재세 도입 이전까지 영국에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거꾸로 보조금을 받아갔다. 적자, 감가상각, 시추시설 해체 비용 등 이런저런 비과세·감면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횡재세의 경험이 있다. 1970년대 오일 쇼크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카터 행정부 때인 1980년에 도입했다가 레이건 행정부 때인 1988년 폐지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횡재세가 오히려 미국에 손해를 끼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횡재세 도입에 따른 세수의 순증가분은 예상액의 약 5분의 1에 불과했다. 횡재세로 인해 기업의 이익이 줄게 되자 법인세가 따라서 줄었기 때문이다. 반면 세금으로 인해 석유의 국내 생산은 줄고 수입은 늘어 국제유가 변동에 따른 취약성이 늘어났고, 석유산업과 유관 산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중소기업과 개인들이 피해를 봤다.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한 세금이었다는 것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얼마 전 횡재세를 거론하면서 석유회사 엑손이 작년에 “신보다도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다는데, 신께서 소득이 그리 많은지 이번에 처음 알았지만 횡재세 도입 이전에 신께 소득세 고지서부터 발부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에서 횡재세는 사회주의이거나 아니면 포퓰리즘이라는 강력한 반발에 직면해 있다.

그러면 허리가 휘청하는 난방비는 어떻게 해야 하나. IMF의 권고사항은 이렇다. 횡재세를 고려한다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대추구 행위에 대한 항구적 제도로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기영합적인 포퓰리즘 정책이 아니라 차분히 나라의 근간을 튼튼히 하는 데 전념하라는 뜻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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