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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우석훈의 달달하게 책 읽기] 50년 넘게 버틴 노포의 비결은 ‘담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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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조선일보

책을 많이 보기는 하지만, 책을 읽는 게 즐겁지는 않다. 힘들고 괴롭지만 참고 본다. 내가 보는 책들은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운 게 많고 더럽게 어렵다. 독서의 즐거움 같은 건 잘 모르겠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싫은 걸 참고 책을 보는 게 나의 독서다.

우연히 박찬일의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인플루엔셜)을 읽으면서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셰익스피어를 처음 읽고 그의 책을 몰아 읽던 시절이 생각났다. 박찬일의 다른 책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움베르토 에코 이후 그렇게 찾아 읽은 것은 오랜만인 듯했다. 박찬일의 초기 책들은 확실히 에코의 스타일과 유사한 점이 있다. ‘MSG’ 싹 빠진 담백함 그 자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음식 책을 끝까지 못 읽었을지도 모른다.

돼지국밥을 안 먹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고, 최근에는 어쩔 수 없이 반 년 넘게 아주 맛없는 돼지국밥을 주기적으로 먹어야 했다. 그 돼지국밥 얘기가 맨 앞에 나온다. 나는 추어탕도 해장국도 즐기지 않는다. 그가 맛있다고 한 음식에 동감한 것은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충동 돼지족발 얘기다. 동국대 강사 시절, 참 맛있게 먹었다. 그러나 나의 취향보다는 50년 넘게 버틴 노포들의 아우라와 박찬일의 스타일 덕분에 몇 십 년 만에 책 읽는 즐거움을 다시 느꼈다.

조선일보

우석훈 경제학자·성결대 교수


책을 많이 읽다 보면 책만 봐도 쓴 사람이 어느 정도는 느껴진다. 많은 작가가 너무 잘났거나 아니면 반대로 열등감 과잉이라 유명한 사람의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하려고 한다. 박찬일의 책에는 그런 게 없다.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이 가게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도 당신도 생각해보라며 친절하게 시간의 무게로 독자를 인도한다.

책을 덮고, 내 인생도 조금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게 책은 박찬일류와 비(非)박찬일류로 나뉠 것 같다. ‘MSG 프리(free) 책’과 ‘MSG 가득한 책’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자극과 재미는 없어도 오래가는 가게는 마케팅과는 별개 아니겠는가? 그의 책을 읽고 일주일 후, 나는 팔릴지 자신이 없어서 주저하던 에세이집을 한 권 쓰기로 마음먹었다. 초창기 내게 글쓰기 스승은 움베르토 에코와 아이작 아시모프였는데, 이제부터는 박찬일이다. 그렇게 담백한 사람을 한국에서 언제 봤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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