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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동서남북] 실리콘밸리 감원 칼바람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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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테크기업들 대규모 해고

다른 산업으로 혁신 확산 계기

의대가 인재 블랙홀 된 한국

이대로면 미래 경쟁력 유지 못 해

한국도 미분양 아파트가 쏟아지고 대기업 CEO가 “1000원도 아끼자”고 호소하는 상황이지만 미 실리콘밸리 감원 한파 소식을 접하면 ‘진짜 살벌하다’는 생각이 든다. 팬데믹 기간 역대급 호황을 누렸던 테크 기업들이 고금리와 수요 급감에 직면하자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만명을 해고했다. 실업률 3.7%, 완전 고용이나 다름없는 미국 전체 고용 시장과 딴판인 이런 현상을 일컫는 ‘소프트웨어 리세션(recession)’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다. 세계 최고 인재 블랙홀이던 실리콘밸리가 위기 신호를 가장 먼저 알리는 ‘카나리아’로 전락했다는 평도 나온다.

조선일보

1월 20일 미국 뉴욕 구글 빌딩. 구글 모기업 알파벳은 12000명을 해고 할 예정이다./UPI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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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감원 러시는 누구보다 20~30대 청년 개발자들에게 충격이라고 한다. 글로벌 금융 위기(2007~2008년) 이후 대략 15년간 위기가 없었던 사회에서 성장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실리콘밸리에서 최고 대접을 받던 이들이 처음으로 삶의 냉혹함을 맛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메일 한 통이나 화상회의를 통해, 심지어 회사 전산망 접속이 차단된 걸 보고 해고 사실을 깨닫게 하는 방식은 아물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고 한다.

이들의 좌절은 그러나 전통 기업들로선 반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다. 디지털 전환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려는 제조, 금융, 유통 기업들로선 단기간에 수만~수십만 명의 일류 개발자가 쏟아지는 큰 장이 선 것이다. 실제로 실업자가 된 미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79%는 석 달 안에 재취업에 성공한다고 한다. 실리콘밸리 밖 다양한 산업 분야에선 인재는 여전히 공급 부족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 IT업계에선 그래서 ‘인재의 재분배(redistribution)’라는 말이 나온다. 실리콘밸리에서 혁신을 체화한 젊은 개발자들이 산업 각 분야로 혁신과 변화를 전파하는, 일종의 분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메타버스 같은 밑 빠진 독에 수조 원을 쏟아붓는 회사(메타)에서 헛힘 빼느니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낫다” “140자 메시지 놀이(트위터) 보다 가치 있는 일이 널려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상처받은 실리콘밸리 청춘들에겐 미안하지만 의대가 인재 블랙홀이 돼버린 한국으로선 차라리 부러운 얘기다. 고3 아들을 둔 한 지인은 “의대를 지망하는 아들이 재수를 결심했다”고 했다. 원서를 넣었던 여러 대학 이공계 학과에서 합격 통보가 왔지만 아들은 시큰둥하더란다. 그런데 서울 대치동에 있는 의대 입시 전문 유명 재수 학원 전형을 통과했다는 소식엔 환호하더라는 것이다. 이른바 ‘올케어’로 불리는 이 학원은 교재비와 급식비를 뺀 한 달 수강료만 200만원이라, 1년이면 대학 2년 치 등록금이다. ‘7수를 해도 의대’라는 세태 때문에 학비 무료에 삼성전자 취업이 보장되는 일류대 반도체 학과조차 정원을 채우려면 줄줄이 추가 합격자를 받아야 하는 게 우리 현실이다.

국내 자산운용업계의 한 임원은 “세계 제조 기지라던 중국이 미·중 갈등 와중에 글로벌 공급망에서 탈락한 것은 한국엔 더 없는 기회”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만큼 품질과 가격 모두 우수한 소재, 부품을 공급할 수 있는 국가가 어디 있느냐”며 우리 경제의 앞날을 밝게 본다고 했다. 하지만 K-반도체, K-배터리의 비교우위도 인재가 공급되지 않는 한 지속될 수 없다.

미 빅테크의 대규모 감원 소식을 전한 한 외신의 인기 댓글 중엔 “서른에 겪은 구조 조정은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다”는 한 개발자의 글이 있었다. ‘아프니까 개발자다’ ‘아프니까 창업자다’라는 현실 감각으로 무장한 청년들이 쏟아지는 미국과 ‘SKY’ 이공대에 합격하고도 의대 가겠다며 수천 명이 자퇴하는 한국. ‘실리콘밸리 청춘들의 아픔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길성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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