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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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는 진실이 없어 감정적 불확실성을 안기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20여 년 만에 조국인 멕시코에서 자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 찍은 영화 ‘바르도’로 귀환했다. 부제는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다. 멕시코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실베리오(다니엘 기메네즈 카초 분)가 기억 속 자신의 정체성과 가족 관계, 조국의 과거와 씨름하며 실존적 위기를 헤쳐나간다. 이냐리투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진실인 척 하지 않는 감정적 전기’에 가깝다. 주인공 실베리오를 통해 첫 영화가 성공하고 가족과 함께 멕시코를 떠나 LA로 이주한 이냐리투 감독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냐리투 감독은 “모든 기억과 경험의 기록 속에 어떤 사건을 관통하는 현실에 대한 해석이자 그 사건에 대한 상상과 틈새가 ‘바르도’(중유)이고 기억을 따라가는 개인적 서사이자 멕시코의 역사를 연대기로 기록한 영화”라고 소개했다. 다소 장황한 그의 설명과 달리 영화 ‘바르도’는 압도적인 시각미로 상상과 틈새를 시각화하고 있다. 6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됐는데 봉준호 감독과 영화 ‘옥자’에서 함께 했던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의 카메라 움직임이 환영을 제대로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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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는 제35회 도쿄국제영화제 갈라 부문에 초청됐다. 덕분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을 베니스 영화제에 이어 또 기자회견에서 만났다. 구로사와 아키라상을 수상한 이냐리투 감독은 “도쿄와의 인연은 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모레스 페로스’로 도쿄 영화제 그랑프리와 감독상을 수상해 10만 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35세의 감독에게는 운명을 바꾼 대사건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25년의 영화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가 3편 있다. ‘라쇼몽’ ‘란’ ‘7인의 사무라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과 미학적 힘을 알게 해준 영화의 신”이라고 일본 거장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구로사와 감독이 기억 속에서 자신을 실존하게 해준 사람이나 사건에 관한 추억을 선별해 ‘란’을 완성했다면 이냐리투 감독은 스스로를 실존적 한계로 몰아가며 모든 영혼과 신념, 그를 지켜온 사회적 관습을 갈아 넣어 ‘바르도’를 내놓았다. 이냐리투 감독은 “영화의 본질은 ‘언어’이다. 그래서 언어의 개연성을 탐험하는 작품을 내놓고 싶어 ‘바르도’는 전통적 구조에서 탈피해 마음의 상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다”고 부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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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엇갈린 평을 받았다. ‘자의식 과잉’의 감독이 3시간 동안 주야장천 자기 이야기를 계속 늘어 놓긴 한다. 워낙에 이냐리투 감독은 말이 장황한 편이다. 과거 오스카 수상자 회견에서도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를 사용했는데 자신의 철학을 적확한 언어로 전달하고 싶어했다.
이냐리투 감독의 거짓된 연대기에서 진실로 섞인 장면을 찾으라면 바로 미국과 멕시코 전쟁에 얽힌 실화다. 영화 속 대사 “1846년 미국의 침공으로 멕시코는 나라의 절반을 잃었다”가 이를 말해준다. 1847년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 시티 관문 차풀테펙 전투에서 멕시코 군대는 참패를 당했다. 멕시코 시티를 함락한 미국은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할양받았다. 미 해병대 군가 도입부 “몬테수마의 궁전에서 트리폴리 해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조국의 전투에서 싸운다네”에 등장하는 몬테수마가 바로 차풀테펙 전투의 격전지다. 멕시코는 이 전쟁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한 6명의 사관생도들을 기리기 위해 매년 9월13일을 ‘어린 영웅들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냐리투 감독의 마음 속에 그리움으로 자리하는 멕시코 시티에서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 이후 21년 만에 만든 영화이니 오죽 할 말이 많았을까. 그래도 16일부터 방영되는 넷플릭스 버전은 22분 컷한 극장 개봉판이다./ 하은선 미주한국일보 부국장, HFPA 회원
문화부 sedailycultu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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