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고귀한 야만인

. 편집자주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작가였던 외할머니 기질을 쏙 빼닮은 폴 고갱은 글 솜씨도 남달랐습니다. 이 남자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 그의 말과 수필 등을 참고해 가상 일기를 씁니다. 굵게 표시한 건 실제로 폴 고갱이 남긴 글입니다. 〉

1897년 4월 30일
헤럴드경제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일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수평선을 보며 꺽꺽 울었다.

이마로 땅을 마구 찧었다. 습진투성이 몸을 벅벅 긁었다. 팔다리 곳곳에 핏방울이 맺혔다. 내 딸 알린은 나를 유독 많이 닮았었다. 그런 알린의 죽음 소식이 담긴 편지를 갈가리 찢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가족도, 친구도 없다. 이제는 내 분신처럼 여긴 알린조차 없다. 모두 나로 인해 상처받고 떠났다. 바깥세상과 가로막힌 외딴섬까지 쫓아온 건 1800프랑 빚뿐이었다. 지쳤다. 나는 오랫동안 고통 속에 있다. 내게는 한순간의 쉼도 주지 않으려는 적들이 있는 게 분명하다. 붓을 쥐었다. 결심했다. 생애 마지막 작품을 남기고 미련 없이 떠날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기구한 생을 살다 갈 생각이었다.

그날부터 꼬박 열흘간 그림을 그렸다.

내가 저지른 셀 수 없는 죄를 고백하는 행위였다. 만신창이가 된 내 삶에 대한 유서를 짓는 의식이었다. 배도 고프지 않고, 졸리지도 않았다. 연고와 주사기, 악마인지 모를 누군가의 환청과 함께했다. 고열이 온몸을 감쌀 때쯤 겨우 다 그렸다. 이승에서 할 일을 끝마쳤다. 나는 미련 없이 그림을 내팽개쳤다. 작업실 문을 걷어차고 밖으로 나왔다. 홀린 사람처럼 산을 탔다. 욱신대는 발목을 질질 끌고 올라갔다.

헤럴드경제

영화 고갱(Gauguin·2017) 예고편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꼭대기에 섰다. 섬의 한가운데이자, 바다의 한가운데였다. 이 안에서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내 비참한 최후를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주머니를 뒤적였다. 묵직한 약통을 꺼냈다. 결단의 순간에 망설이지 않았다. 의식이 흐려졌다. 바람이 훅 불었다. 소금기를 품었는지 짭짤했다. 두 눈이 감겼다. 그래도 평생의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아. 누추하고 아팠어도, 절대 후회하지 않아.

1883년 O월 O일(14년 전)
헤럴드경제

폴 고갱, 과일과 레몬이 있는 일상, 1880년 무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솔직히 쓰겠다. 프랑스 파리에서 터진 금융 위기를 보며 나는 남몰래 웃었다.

주식 중개인 직업을 잃었지만 속으로 기뻐했다. 드디어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다! 본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이제 일에 치이다가 주말에만 깔짝대는 '일요화가'와는 안녕이다. 나는 자신했다. 나는 위대한 화가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 제대로만 하면 마네, 드가 뺨칠 작품을 낼 것으로 확신했다. "꼭 그래야겠어요?" 퇴직금을 털어 화구를 잔뜩 살 때 아내가 말했다. "응." 나는 퉁명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림을 그려야겠어.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아내는 흠칫 놀랐다. 내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여운을 느낀 것이었다. "나는요? 우리 아들, 딸은…." 아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떨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임질 수 없어요?" 아내가 절망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렇게 죄를 지었다. 내가 믿는 큰 뜻을 위해서였다.

헤럴드경제

영화 고갱(Gauguin·2017) 예고편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선원 경력 6년, 주식 중개인 경력 10년, 성실한 남편이자 다섯 아이의 35살 아빠.

그런데도 나는 갑자기 미술에 헛바람이 든 게 아니다. 누구든 예술가로 만든다는 '파리의 열병'에 걸린 건 더욱 아니었다. 나는 훨씬 오래전부터 화가를 꿈꿔왔다. 어머니의 단짝 친구이자 나의 법정 후견인, 아로사를 통해 마네, 모네, 피사로 등 그림을 본 후부터 화혼은 들불처럼 번졌다. 특히 세잔! 이 자의 그림은 짜릿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황홀함이었다.

나는 평생을 숨죽여 살다가 금융 위기로 겨우 기회를 잡았다. 이건 신의 부름과 다름없다. 더는 응답을 망설일 수 없다. 가야 한다. 끝내 초라해진다고 해도, 결국에 가선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나아가야 한다. 사람은 가진 의지만큼만 의미가 있다. 기실 예술가라면 그 의지에 도박을 걸어야 한다.

1886년 O월 O일
헤럴드경제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6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빌어먹을 쇠라!

뺀질뺀질한 그놈에게 이번 인상주의 전시에 온 사람들의 이목이 다 쏠렸다. 어딜 가도 그놈이 점을 마구 찍어 그린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이야기만 했다. 내가 볼 땐 그저 저주받은 점일 뿐이었다. 내 그림은 철저하게 묻혔다. 프랑스 서북부 퐁타방(Pont Aven)에 파묻혀 그린 야심작들에 눈길 주는 이 하나 없었다.

1863년 마네가 충격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선보여 전설이 된 일처럼, 나도 쇼킹한 작품만 선보이면 단숨에 왕관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번 수모를 겪고 깨달았다. 첫째. 생각만큼 쇼크를 주는 작품을 그리기는 쉽지 않다. 둘째. 뛰는 놈 위에는 늘 나는 놈이 있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되뇌었다. 그림에 더 미쳐야 한다. 예술에 더 매달려 나도 날아가야 한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브르타뉴의 양돈가, 1888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허름한 여관방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내게 지친 아내와 아이들이 아내 고향 덴마크로 떠난 뒤 줄곧 혼자였다. 나는 나를 이해하지 않는 가족을 배반했고, 가족은 돈을 벌어오지 않는 나를 저버렸다.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동전 하나 없다. 기차역에 다시 가야 할까. 시간당 3.5프랑을 받고 표를 끊어주는 그 일을 또 해야 할까. 아니다. 그럴 시간 없다.

동료 화가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그들을 동료라고 할 수 있을까. 그놈들이 나를 대고 페루인의 피가 섞인 혼혈아라고 뒷말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안다. 물론 내가 독설을 날리고 쌈박질도 좀 하긴 했지만, 그놈들은 나를 대놓고 경계했다. 그러니 돈을 빌리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누이가 있는 파나마에 가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곳에서 돈을 벌겠다. 남은 시간에는 파리에서 볼 수 없는 이국적 풍경을 캔버스에 가득 담겠다.

1888년 12월 26일
헤럴드경제

빈센트 반 고흐, 붉은 베레모를 쓴 남자(폴 고갱)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도망치고 있다. 빈센트로부터.

나는 2개월 전, 프랑스 남부 아를에 있는 빈센트의 '노란 집'에 짐을 내려놨다. 어딜 가도 사고를 치는 빈센트가 예뻐서 온 게 아니었다. "당신 작품을 한 달에 하나씩은 꼭 살게요. 우리 형과 같이 있어 줘요." 빈센트의 동생이자 능력 있는 화상(畫商), 테오와의 거래였다. 야심 차게 간 파나마에서 말라리아만 얻고 온 내 입장에선 그나마 수월히 돈을 벌 기회였다. 나와 빈센트는 이곳에서 함께 작업했다. 우리는 안 맞았다. 너무 극과 극이었다. 내 성격은 원래 개차반이었다. 빈센트는 대체로 선했다. 그러나 그 안에 짐승처럼 격정적인 면이 도사렸다. 나는 빈센트에게 그 빌어먹을 임파스토(impasto·유화에서 물감을 겹쳐 두껍게 칠하는 기법)를 때려치우라고 했다. 어수선한 게 딱 질색이라고 충고했다. 흥분한 빈센트는 자기도 다 생각이 있다고 고함쳤다.

우린 서로에게 중간이 없었다. 매일 밤새 싸웠다. 전기에 감전된 듯 흥분해서 다퉜다. 싸움이 끝나면 배터리가 다 빠진 듯 몸이 피곤하고 머리도 멍청해지는 듯했다. 집안에는 성한 물건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 날, 빈센트는 화해의 표시라며 직접 만든 수프를 건네줬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 수프에 무엇을 넣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치 그의 그림 색깔처럼 재료들이 뒤섞였다. 속이 울렁댔다.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오만 정이 뚝 떨어졌다. 이 집에 더는 머물 수도 없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빈센트는 결국 사고를 쳤다.

나는 수프를 내다 버린 그날부터 이곳을 떠날 궁리만 했다. 차라리 곰팡이 낀 예전 여관방이 더 나았다. 빈센트는 내가 나가려는 것을 눈치챘다. 빈센트는 나를 붙잡고 싶어 했다. 그는 태생적으로 외로운 자였다. 나도 나지만, 그의 광기는 차츰 극에 치달았다. 곧 폭발하려는 화산 같았다. 사흘 전 우리는 또 다퉜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날 빈센트는 술에 취해 압생트 잔을 던졌다. 나는 빈센트의 멱살을 쥐고 그의 침실로 끌고 갔다. 억지로 눕힌 후 방을 나가려던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빈센트가 면도칼을 쥐고 비틀대며 쫓아왔다. "제발, 적당히 좀 해!"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빈센트를 침대에 거칠게 꽂았다.

헤럴드경제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헤럴드경제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침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완전히 질렸다. 집 밖으로 나가 싸구려 여관에서 잤다. 다음 날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폴 고갱 선생. 경찰서에서 왔소." "뭐라고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빈센트 반 고흐가 자기 귀를 잘랐습니다." 아아, 마침내. 아니, 기어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난 나는 바로 짐을 쌌다. 파리행 기차에 올라탔다. 새로운 샛길을 찾겠다. 다시는 아를에 올 일도, 빈센트를 볼 일도 없을 테다.

1891년 6월 28일
헤럴드경제

영화 고갱(Gauguin·2017) 예고편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 내가 택한 샛길은 열대의 땅이었다.

나는 이 섬 위 최초이자 최후의 화가로서 신의 계시, 악마의 영감을 독차지할 것이다. 고정관념에 찌든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지긋지긋한 이 바보 같은 경쟁에서 질려버렸다. 나는 마르세유에서 오세아니엔 호를 탔다. 63일간 견디기 힘든 기다림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설렘을 안고 무사히 내렸다.

드디어 타히티였다. 처음 보기에 이 작은 섬은 별로 색다를 게 없었다. 태고의 대홍수로 잠긴 산봉우리만 겨우 수면 위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 뿐이었다. 이번에는 무서울 게 없다. 시인 친구들이 모금한 돈 1만 프랑이 있다. '타히티의 관습과 풍경을 연구하고 그려보라.' 프랑스 교육부에 어깃장을 놓고 억지로 얻어낸 훈령도 갖고 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189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닌 이 섬에 있다.

나는 타히티의 원주민과 원시적 삶을 교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도 문명화의 바람을 맞았다. 특히 내가 내린 이곳, 타히티 북서쪽에 있는 파페에테는 그간 꿈꾼 원시의 땅이 아니었다. 내가 그토록 떨쳐버리려고 한 근대화의 바람이 이곳까지 닿았다. 도시의 관습, 패션, 악행, 문명의 모든 모순까지 그대로 서려 있다.

타히티의 원주민 소녀들은 나를 본체만체했다. 애써 그림을 그려줘도 뚱하게 쳐다봤다. 워낙 많은 '서양인'을 본 탓에 새로울 게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사랑한 건 옛날의 타히티다. 지금의 타히티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그토록 도망치고자 한 바로 이런 것을 다시 보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것인가.

1892년 O월 O일
헤럴드경제

영화 고갱(Gauguin·2017) 예고편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림 조수이자 모델, 섬의 안내자이자 내 고질병을 돌볼 간호인이 필요했다.

그렇다. 야만스럽게도, 이 섬에서 함께 살 새로운 아내가 필요했다. 나는 타히티의 남쪽으로 움직였다. 원시 문명을 찾아 밀림 깊숙한 곳까지 찾아갔다. 아직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파타이에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살을 맞대며 함께 살 이를 찾아봤다. 때마침 한 원주민 여인이 자기 딸을 소개해준다고 했다. 나를 부유한 유럽인으로 본 모양이었다. 승낙했다. 이 섬의 관습에 따라 시험 삼아 여드레간 그녀의 딸과 함께 살았다. 아무런 문제 없이 모든 의식을 끝마쳤다. 그제야 신부를 맞을 수 있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테마하나의 조상들, 1893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테마하나, 나이는 13살이었다. 이국적 아름다움을 품은 앳된 소녀였다. 나는 테마하나를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테마하나의 소개로 마주한 원시림의 절경도 캔버스에 담았다. 이제야 그림을 좀 알 것 같았다. 곧 미술계에 큰 폭탄을 하나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1893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이번에는 이 섬이 아니라 나에 관한 것이다.

테마하나와의 생활은 즐거웠다. 그녀가 임신했을 때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행복감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외롭다. 공허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 같다. 의기양양하게 섬으로 온 나는 향수(鄕愁)병에 은은하게 젖었다. 돈도 거의 다 떨어졌다. 매일 밤 편지를 싣고 오는 배를 기다렸다. 내 몫의 편지는 늘 없었다. 혹시나 내가 힘들까 봐 도시에서 보내오는 수표도 없었다. 그림 수십장을 그려 실어 보냈지만, 팔렸다는 소식 하나 듣기가 힘들었다.

대체 육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내가 떠난 사이 또 다른 미술 혁명이 터졌는가. 나를 미술계로 끌어들인 화신(畵神)이 어서 돌아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여기에서 평생 살겠다"는 다짐을 번복했다. 테마하나에게 뭍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병 치료를 핑계로 댔다. "저는, 그리고 우리 아이는요?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건가요?" 나는 근 10년 전 그날처럼 고개를 떨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또 죄를 지었다. 내가 믿는 대의, 거역할 수 없는 숙명 탓이었다. 나와 함께 육지로 갈 건 그림 60여 점뿐이었다.

1893년 O월 O일
헤럴드경제

폴 고갱, 마리아를 경배하며, 189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체 왜!

나는 두 살을 더 먹었지만 이십 년은 더 젊어져서 왔다. 분명 무언가 될 것 같았는데, 또다시 좌절만 맛봤다.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을 내세웠다. 미술시장은 시큰둥했다. 파란은 없고 혹평뿐이었다. 내가 받은 충격은 컸다. 먼 이국땅까지 가서 지핀 화혼이 이렇게 싸늘한 대우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옛 가족이 떠올랐다. "나, 파리로 돌아왔어. 우리 만날 수 있을까?" 망설임 끝에 덴마크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의 집으로 편지를 썼다. "싫어요." 답장은 냉혹했다. 습관적으로 또 주머니를 뒤적였다. 잡히는 건 고작 4프랑이었다. 당장 내일은 뭘 먹고 살아야 할까. 자처한 슬픔을 이제는 접어둬야 할까. 나는 돼지천 같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올렸다. 눈을 질끈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왕의 종말, 1892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 내게 뜻밖의 행운이 왔다. 삼촌이 갑자기 죽었다. 삼촌 유산 중 절반인 9000프랑이 내 몫으로 내려왔다. 그 돈으로 다시 화구를 샀다. 새 옷도 입고, 파리 제싱제도릭 6번가에 있는 아파트도 빌렸다. 새 보금자리가 된 이곳의 이름을 'ici faruru(here is love)'로 지었다. 크롬 옐로우(Chrome Yellow) 색으로 칠한 그 방에 팔리지 않은 그림을 내걸었다. 매주 목요일에 파티를 열었다. 무하, 볼라르, 몽프레드 등 화가와 수집가를 불러 예술과 술을 놓고 토론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설교 뒤의 환영(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1888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평생 이렇게 살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퐁타방 일대를 거닐다가 선원 무리와 시비가 붙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깝죽대는 한 놈의 멱살을 잡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갈겼다. 이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귀에서 우두둑하는 무언가가 들렸다. 내 다리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정신 차려보니 병원 침대였다. 전신 타박상을 입었다. 뼈는 으스러지거나 부러졌다.

더 열불나는 게 있었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여태 내 아파트 안주인 역할을 한 여자가 그림을 다 들고 도망쳤다. 날 집단폭행한 그놈들은 고작 600프랑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울화통이 터졌다. 나는 병원 침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병원 사람들은 질린 듯 그런 나를 상대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얼마의 돈을 구하면 다시 떠나겠다. 아무것도 내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잘 될 것이다. 이 유럽인들의 삶은 얼마나 무감각한가!

1897년 4월 29일
헤럴드경제

폴 고갱, 바이루마티, 1897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 이곳, 타히티 원주민들은 내 눈에 초점이 없다고 수군대고 있다. 인정한다. 내가 병자처럼 보이기는 한다. 얼굴은 뒤틀렸다. 온몸에 피딱지가 붙어있다. 다리는 아직도 절뚝인다. 매일 밤 악몽을 꾸고 울거나 비명을 내지른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테마하나도 이런 모습을 보고 다시 떠나갔다. 나는 새 뮤즈를 찾았다. 14살의 파후라였다.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나만 볼 수 있는 이 섬의 절경도 캔버스에 담았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예수의 탄생, 1896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불행은 잊지 않고 찾아왔다.

이번에는 이 섬에서 태어난 내 딸아이가 고작 2주일 만에 죽었다. 나는 그간의 죄를 떠올리며 울음을 꾹 참았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며칠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아, 저 멀리서 배가 한 척 온다. 느낌이 왔다. 이번에는 내 편지가 있을 것 같았다. 내 그림을 보고 감동한 이의 주문 의뢰서가 있을 듯했다. 나는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덴마크에 있던 내 딸, 내 분신 알린이 죽었다는 글이 쓰여있다. 그것도, 3개월 전에.

1897년 5월 1일
헤럴드경제

영화 고갱(Gauguin·2017) 예고편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입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냈다.

산꼭대기에서 정신을 잃고 꼬박 하루가 흘렀다. 무거웠던 약통은 텅 빈 채로 저 멀리까지 굴러가 있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다.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정신이 돌아왔다. 화신은 내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거의 구르듯, 떨어지듯 땅바닥을 밟았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작업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참을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숨이 턱 막히는 엄청난 걸 봤다. 그 안에는 악마, 아니 화신이 있었다. 화신이 내 몸을 빌려 그린 그림이 그대로 있었다. "맙소사." 이걸 내가 그렸다고?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내 얼굴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일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일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일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나 또한 이 그림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열병이 이끄는 대로 미친 듯이 그리기만 했을 뿐이다.

오른쪽에 누운 아기는 과거, 한가운데 선 젊은이는 현재, 왼쪽 아래 웅크리고 귀를 막은 늙은이는 미래였다. 늙은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이는 바이루마티다. 폴리네시아 전설 속 여신이자 타히티의 어머니다. 늙은이 왼쪽 흰 새에게는 생명의 순환이 느껴진다. 왼쪽 윗부분에는 타히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신의 상이 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일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 곁에는 내 딸, 알린도 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인생 여정이 모두 담겨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나는 이토록 낯선 내 그림을 더듬으며 중얼댔다. 물감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 그림은 여전히 축축했다.

1903년 O월 O일
헤럴드경제

영화 고갱(Gauguin·2017) 예고편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늘 그랬듯, 나는 또 내 평안에 반하는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야생을 찾아 계속 움직였다. 히바오아까지 갔다. 여기에 틀어박혀 원시의 절정을 그리고 있다. 안다. 이 작품들을 도시로 보내봤자 또 '유치하다' 따위 평이 따라올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래도 붓을 꺾을 수 없다. 운명이다. 자처한 슬픔, 영원한 불행은 내 필연이다. 소일거리로 글을 쓴다. 칼럼도 쓰고, 수필도 쓰고 있다. 이곳에서 텃세를 부리는 이들과도 글과 말을 통해 맞섰다. 술에 취했다는 것 때문에 기소된 원주민 29명을 돕기 위해 변호사로 나서기도 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어쨌든 내 본성대로 살고 있다.

헤럴드경제

폴 고갱,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화가의 자화상, 1890~1891


내 병세는 나날이 깊어진다.

진통제에 의존하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다. 다들 나에게서 아예 표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한 주술사는 그간 무슨 일을 겪었기에 얼굴이 이렇게 됐느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갑자기 쏟아지는 스콜처럼 생명을 앗아갈 것이다. 여기는 어디의 샛길일까. 어디의 샛길이지. 돌아보면 내가 사랑했던 자리는 늘 폐허가 됐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렸고, 나 또한 그것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야만인. 고귀한 야만인. 내 곁에 끝까지 남은 건 이 수식어 뿐이었다.

〈참고 자료〉

노아노아, 폴 고갱, 글씨미디어

죄와 벌, 도스토옙스키, 민음사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민음사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까치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2)“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로댕의 맞수 (2022. 11. 5.)

3)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4)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영원한 라이벌 (2022. 9. 10.)

5)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

yul@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All Rights Reserved.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