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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정동칼럼] 월드컵, 둥근 공에 깃든 눈물과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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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은 국가대항전이다. 국가나 집단에 대한 유대감은 누구나 있는 성향이다. 소속감은 의도적으로 동원되었을 때 문제가 된다. 월드컵을 중계하는 영상은 국기, 전통의상, 민족 정체성 상징물을 자주 비춘다.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자, ‘승부와 경쟁’을 자극하기 위해 기획된 배치이다.

경향신문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월드컵에서 국가 간 대결 때보다는 인간애의 공통성을 발견할 때 더 깊이 감동한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약소국가를 응원하는 진정 어린 마음에서 1954년의 한국 축구대표팀을 만난다. 축구를 통해 강렬한 존재감을 증명해내는 이변의 주역들에게서는 1966년 런던 월드컵의 북한 대표팀 모습이 그려진다. 국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의 대표선수들이 자국민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려는 투혼에서 2002년 한국대표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둥근 공에는 의외성이 있다. 규칙은 정해져 있지만, 승부는 마지막까지 불확정적이다. 나는 승리를 갈망하되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즐김을 동경한다. 긴장과 몰입,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 월드컵 역사에서 1954년은 특별한 해였다. 제5회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출전한 한국대표팀은 헝가리 대표팀에 9 대 0으로 졌고, 터키 대표팀에 7 대 0으로 패배했다. 첫 출전국이었음에도 당시 최강 우승후보였던 헝가리에 9점만 내준 것이 대단했다. 한국인들은 패배만 하고 귀국한 대표팀을 위해 ‘세계축구선수권대회 환영축구대회’를 열어줄 정도로 경기 결과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월드컵 예선에서 일본을 누르고 승리한 것에 대해 ‘해방 후 처음의 환희’라고 한껏 고무되었다.

한·일전 승리는 일제강점기의 상처를 축구로 조금이나마 극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에 그 의미가 각별했다. 스위스 월드컵 이후 귀국한 한국대표팀 주장 주영광은 ‘세계축구계의 현황’(동아일보 1954·8·22)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한국축구가 세계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1) 축구전용 구장 2) 훌륭한 지도자 3) 경제 성장 4) 선수들의 교양’이 필요하다고 했다. 세계 무대를 경험하고 돌아온 선수가 첫 출전국의 비애를 담아 미래의 열망을 표출했다.

한국에서 ‘월드컵’이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한 때가 1965년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세계축구선수권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한국대표팀은 1966년에 런던에서 열리는 제8회 월드컵에서 예선 출전마저 포기했다. 장경환 축구평론가는 축구협회의 미숙한 행정에 대한 질타를 하면서, ‘월드컵’과 ‘월드컵 위원회’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처음 썼다.(동아일보 1965·4·13)

공교롭게도 1966년 런던 월드컵에서는 ‘북한의 8강 돌풍’이라는 축구 역사에서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은 당시 우승 후보인 이탈리아를 1 대 0으로 이기는 최대 이변을 만들어냈다. 8강에서는 포르투갈에 3 대 5로 역전패를 당했다. 한국에서는 1966년부터 런던에서 이뤄진 ‘북한 축구단의 활약’을 부러움을 담아 보도하면서 ‘월드컵’이라는 표현을 본격적으로 사용했다.

2002년은 ‘6월의 기적’으로 한국이 온통 들썩였다. 한국 축구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으로 눈물을 흘렸던 한국인의 눈물을 닦아주었으며, 아시아 역사상 월드컵 최고 성적을 거뒀다. 1954년 주영광의 네 가지 열망이 48년 만에 결실을 맺은 때가 2002년인 셈이다. 그 이후로 한국 축구는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 월드컵 10회 연속 본선 진출, 한국 축구대표팀에 붙은 화려한 휘장들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변하고 있다. 과거의 영광과 환희 때문에 대표팀 선수들에게 투지, 근성, 정신력 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한국대표팀이 ‘투지, 근성, 정신력’으로만 버티는 팀이 아님을 증명했다. 월드컵에서 2회나 우승한 우루과이와 대결하면서도 시종일관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게 경기를 주도했다.

가나전에서는 비록 지기는 했지만 강팀이 약팀을 밀어붙이듯이 공격적인 축구를 펼쳐나갔다. 한국대표팀은 3일 1966년 북한을 패배시킨 포르투갈과 16강 진출을 향한 일전을 벌인다. 한국대표팀은 2002년 월드컵에서 이미 포르투갈을 1 대 0으로 이긴 승리의 경험도 있다.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도 ‘당당한 실력’으로, 한국 축구의 색깔을 펼쳐보이길 기대한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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