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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세계경제 무대로 이끈 장쩌민 전 국가주석 사망···향년 9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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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앓다 상하이서 사망

G2 도약 기반 닦은 지도자

권력욕과 부패 유산 비판도

경향신문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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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세계 양대 강국(G2)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되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30일 9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뉴욕타임스는 제로 코로나 정책 반대 시위를 거론하며 그의 죽음이 중국 정부가 톈안먼 사태 이후 볼 수 없었던 전국적인 정치적 반대 운동에 직면한 미묘한 순간에 찾아왔다고 평가했다.

신화통신 등 중국 언론들은 30일 장 전 주석이 백혈병,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상하이에서 오후 12시13분쯤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장쩌민은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의 뒤를 이은 제3세대 지도자다. 1989년 톈안먼 사태 후 덩샤오핑에 의해 전격 발탁돼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공산당 총서기직을 물려줄 때까지 중국을 이끌었다. 전임자들 같은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중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을 만든 인물로 평가받는다.

1926년 8월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에서 태어난 그는 상하이 명문 자오퉁(交通)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으며 대학 재학 중 장제스(蔣介石) 독재에 맞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46년 공산당에 입당했고, 이듬해 대학 졸업 후 상하이 공장 등에서 일하다 옛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다. 1956년 돌아와서 창춘, 상하이, 우한 등의 공장과 연구소에서 일하며 기술 관료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정치 인생의 도약대는 1985년 상하이 시장이 된 것이었다. 2년 뒤 당 정치국원에 오르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했다. 그럼에도 당시 그를 중국의 지도자감으로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정적 전환점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였다. 학생·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로 위기를 맞은 덩샤오핑이 그해 5월31일 장쩌민을 베이징으로 불러 당 총서기를 맡겼다. 덩샤오핑 자신이 발탁한 개혁파 자오쯔양(趙紫陽)을 실각시키는 대신, 경제적 개혁개방을 추종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보수색채가 강한 장쩌민을 선택한 것이었다.

시위 진압 총대를 멘 보수파 리펑(李鵬) 총리나 차오스(喬石) 상무위원 등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이들을 제치고 장쩌민은 6월 열린 공산당 제13기 4중전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됐다. 장쩌민은 뒤에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상하이 당서기이던 내가 베이징으로 올라갈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상하이 당서기 시절 장쩌민은 이미 모교 교수직을 제안받은 상태였으며 “톈안먼 사태가 아니었다면 아마 대학교수가 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원로들의 의견을 잘 따른다”는 평판 속에 여전히 그를 임시 지도자로 보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장쩌민은 기회를 잘 포착했다. 경제가 최대 무기였다. 1989년 1조6922억위안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5년 뒤 10배로 커졌다. 장쩌민은 경제성장에 발맞춰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이를 이용해 안에서는 자신의 정치권력을 강화했다. 세계 경제를 잘 알고 외국어도 잘 했던 그는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성사시켰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취임 초에는 밖에서 저평가됐던 인물이었던 그가 중국을 국제무대에 복귀시켰다”고 평가했다. 그해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유치했다.

장쩌민은 2000년 ‘3개 대표론’을 발표했고 2년 뒤 이를 공산당 당헌에 집어넣었다.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선봉대라는 이전의 규정을 뒤집고 ‘자본가, 지식인, 노동자·농민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장쩌민은 당을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인민복 대신 양복을 입은 주석’ 장쩌민은 자본가들을 공산당에 입당시킴으로써 중국 사회주의를 변질시켰다는 비판도 많았다. 1990년대 국유재산 민영화와 도시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빈부 갈등은 심해졌고, 동남 연안과 서북부 내륙의 격차도 벌어졌다.

미국의 중국전문가 로버트 로렌스 쿤은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이란 책에서 그를 “중국 문명을 사랑했으며 천부적인 협상 능력과 경제적 식견을 갖고 있는 인물”로 평가한다. 국제무대에서도 중국의 싯구를 인용하며 풍류를 자랑하는 것은 장쩌민의 트레이드마크였다. 1993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색소폰과 중국 전통악기 얼후(二胡)를 논했고, 1997년 하와이 호놀룰루 방문 때에는 ‘알로하오에’를 기타로 연주했다. 언제나 미소띈 얼굴에 누구에게든 ‘좋다’는 칭찬을 한다 해서 ‘하오하오(好好) 선생’으로 불렸으며 문화적 소양과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을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의 권력욕과 ‘부패의 유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다. 장쩌민의 상하이 인맥, 이른바 ‘상하이방’은 정치적 이너서클이자 경제적 이익집단으로 변질됐다. 싱가포르 리콴유 공공정책스쿨의 황징 교수는 “장쩌민은 특권층의 거미줄 가운데에 있는 거미”라고 진단하기도 했다. 장쩌민은 총서기 자리를 내놓은 뒤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2년 더 붙잡고 후임 후진타오를 견제했다.

장쩌민은 2007년 17차 공산당 대회에서 시 주석을 후진타오 이후의 지도자로 띄웠다. 2012년 4월 초에는 비밀리에 베이징에 상경해 군부에 “중앙군사위 주석과 총서기는 시진핑이 맡아야 한다”고 못박았다. 시 주석 반대세력을 찍어눌러준 사람이 바로 장쩌민이었지만, 시 주석은 ‘상왕’을 바라지 않았다. 시 주석은 공산당의 흐름을 보수화로 돌렸으며 부패와의 전쟁을 벌였다. 반부패 작전의 타깃 중에는 장쩌민의 옛 측근이 적지 않았다. 저우융캉(周永康) 상무위원과 인민해방군 서열 1·2위던 궈보슝(郭伯雄)과 쉬차이허우(徐才厚)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숙청됐다. 장쩌민의 두 아들 장몐헝(江綿恒)과 장몐캉(江綿康)은 기술관료와 사업가로 성공했으나 역시 부패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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