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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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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신화’ 이전에 ‘폴라 익스프레스’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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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김도훈의 낯선 사람

로버트 저메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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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7일 로버트 저메키스가 미국 캘리포니아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에서 열린 <피노키오> 월드 프리미어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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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마다 보는 영화가 있다. 물론 당신에게도 그런 영화가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오면 프랭크 캐프라가 연출하고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한 1946년 작 <멋진 인생>(It’s A Wonderful Life)을 본다. 한국인들은? <나 홀로 집에>다. 굳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찾아보지 않아도 수많은 케이블 채널 중 하나는 결국 그 영화를 또 틀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마주하게 된 그 영화를 다시 보고야 말 것이다. 머라이어 케리의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를 지겨워하면서도 크리스마스가 오면 그 노래를 틀 수밖에 없는 이유와도 비슷하다.

나는 크리스마스가 오면 <폴라 익스프레스>를 본다. 크리스 밴 올즈버그의 동명 동화를 원작으로 한 컴퓨터그래픽(CG) 애니메이션(혹은 3D 애니메이션)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크리스마스를 믿지 않는 소년이 산타와 엘프들이 운영하는 북극행 열차를 타고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그야말로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보기 완벽한 판타지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다. 기술이다. <폴라 익스프레스>가 나온 것은 2004년이다. 당신은 그 시절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며 시대의 한계를 느낄 것이다. 시지의 발전은 지난 20여년간 빠르게 이루어졌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의 시지는 2000년대 초반 영화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애니메이션의 영역으로 가면 그런 격차는 더욱 도드라진다.

‘불쾌한 골짜기’를 향한 도전


<폴라 익스프레스>가 개봉하자마자 불평이 쏟아졌다. ‘불쾌한 골짜기’ 때문이었다. 불쾌한 골짜기는 일본 로봇 과학자 모리 마사히로의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어정쩡하게 닮은 로봇은 오히려 우리에게 불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 이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근거는 아직 부족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인간에 가깝게 만들어놓은 복화술 인형을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낀다. 누가 나를 죽이고 싶다면 그 인형을 몰래 침대에 갖다 놓으면 된다. 어쩌면 단순한 공포증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만 인간을 닮지 않은 인형에는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 역시 ‘불쾌한 골짜기’의 증거 중 하나로 채택받을 수 있을 것이다.

초창기 시지 애니메이션의 문제도 이것이었다. 그래서 픽사를 비롯한 이 영역의 선구자들은 인간 캐릭터를 지나치게 인간처럼 만들지 않았다. 일부러 애니메이션답게 만들었다. 불쾌한 골짜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불쾌한 골짜기에 도전한 선구자 중 한명이 <폴라 익스프레스>의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다. 저메키스는 인간 캐릭터를 가장 인간에 가깝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기술은 ‘모션 캡처’다. 인간의 몸에 센서를 부착해 인체의 움직임을 디지털화하는 기술이다. 특히 로버트 저메키스는 단순한 인체의 움직임을 떠나 배우의 연기 자체를 디지털화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당대 최고의 배우 중 한명인 톰 행크스를 캐스팅했다. 톰 행크스는 <폴라 익스프레스>에서 무려 다섯 캐릭터를 연기한다. 저메키스는 행크스의 얼굴에까지 센서를 부착해 그의 연기를 애니메이션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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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익스프레스>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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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영 별로였다. 아직 기술이 무르익지 않았던 탓이다. 톰 행크스의 연기를 기반으로 했음에도 <폴라 익스프레스>의 인간 캐릭터들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눈동자에는 아무런 영혼도 없어 보였다. 미국에서 영화가 개봉하자 “무섭다”며 우는 아이들이 속출했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나라도 그 나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당연히 <폴라 익스프레스>는 흥행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저메키스는 이 기술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모션 캡처를 활용한 시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2007년 작 <베오울프>에서는 앤절리나 졸리를, 2009년 작 <크리스마스 캐롤>에서는 짐 캐리를 캐스팅했다. 두 작품 모두 장렬하게 실패했다. 이후 저메키스는 10여년에 걸친 시지 애니메이션 사랑을 접고 다시 실사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죽어야 사는 남자?


그렇다면 <폴라 익스프레스>는 지나치게 이르게 나온 실패작인가? 그렇지는 않다. 저메키스가 모션 캡처를 활용한 애니매이션을 내놓자 다른 감독들도 이를 주목했다. 제임스 캐머런은 2009년 이 기술을 활용한 <아바타>를 내놓았고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2011년도에 큰 흥행을 기록한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도 모션 캡처 기술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저메키스는 일종의 발판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가 10년에 걸쳐 제작하고 실패한 애니메이션들 없이는 <아바타>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조금 더 늦게 나왔을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이 영역의 선구자로서 지금보다 더 충분한 존경을 받을 필요가 있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항상 그런 감독이었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진화시키는 ‘기술’에 꽂힌 예술가였다. 저메키스는 1980년대 할리우드의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인 <백 투 더 퓨처> 시리즈의 감독으로 출발했다. 이른바 스티븐 스필버그 사단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그는 80년대 말부터 재미있는 시도를 하기 시작한다. 1988년에는 2D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합성한 놀라운 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를 만들었다. 2D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합성하는 기술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기술적 수준을 확 끌어올린 영화는 처음이었다. 1992년에 그는 메릴 스트립과 골디 혼 주연의 <죽어야 사는 여자>를 만들었다. 1991년 제임스 캐머런이 <터미네이터 2>에서 시지로 만든 액체 로봇을 등장시킨 지 1년 뒤였다.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 저메키스는 배우들의 육체를 마구 변형시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시지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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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 익스프레스>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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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로버트 저메키스는 할리우드 감독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정상에 올랐다. 그는 <포레스트 검프>로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영화 역시 그저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는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저메키스는 당대 시지의 모든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는 배우의 멀쩡한 다리를 시지로 지워서 하반신이 절단된 캐릭터로 만들었다. 톰 행크스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오래전 뉴스 장면에 합성했다. 지금에야 널리 쓰이는 초보적인 시지 기법이지만 당대에는 정말이지 놀라운 기술적 성취였다. 그 이후 로버트 저메키스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만들며 시지 애니메이션에 10년을 바쳤다.

지금은 누구도 로버트 저메키스라는 이름을 잘 꺼내지 않는다. 스티븐 스필버그, 제임스 캐머런을 비롯한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대가들이 받는 존경은 좀처럼 저메키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의 후기 영화들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원인일 것이다. <플라이트>(2012), <하늘을 걷는 남자>(2015)와 <얼라이드>(2016) 정도가 약간의 주목을 받았고 나머지는 처절하게 실패했다. 나는 알고 보면 시지를 잔뜩 쓴 그 영화들도 기술적인 예술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구도 더는 “로버트 저메키스 신작이 나왔으니 보러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잊힌 이름이다.

영화사에 새길 이름 ‘저메키스’


나는 이런 평가가 온당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예술적 성취와 기술적 성취를 명확하게 나누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버릇이 있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인문적 영역과 기술적 영역을 어떻게든 분리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그리고 대개는 예술적, 인문적 성취에 더욱 찬사를 보내는 편이다. 세상의 절반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적 영역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인문적 존재들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만을 기억한다. 여기서 ‘인문적 존재’의 대다수는 당연히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차지하고 있다.

인류 역사는 기술의 변화 없이 설명할 수 없다. 이를테면 반도체는 인류 문명 자체를 변화시켰다. 모두가 반도체를 안다. 반도체의 발명가는 모른다. 반도체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은 미국 물리학자인 윌리엄 브래드퍼드 쇼클리다. 미국 대통령 이름을 줄줄 외는 독자도 이 이름은 처음 들어봤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는 “에어컨이 없었다면 싱가포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열대기후 사람들을 온대기후 사람들처럼 뜨거운 태양 아래서도 과로할 수 있게 만든 자본주의적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당신은 리콴유라는 이름을 안다. 하지만 윌리스 캐리어라는 이름은 모른다. 그는 에어컨의 발명가다.

로버트 저메키스는 따지자면 기술적 예술가다. 그는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게 틀림없다. 종종 그런 방식은 예술적인 허점으로 작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가 선도한 기술은 결국 지금 거의 모든 영화의 기반이 됐다. 블록버스터가 아닌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배경을 합성하거나 특정 요소를 지우는 시지 기술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그 공로의 많은 지분은 분명히 로버트 저메키스에게 더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러니 나는 저메키스라는 이름조차 잊어버린 독자들에게 그의 영화들을 다시 보라고 권하고 싶다. 곧 크리스마스 시즌이니 역시 <폴라 익스프레스>가 가장 좋은 선택이다.



영화 잡지 <씨네21> 기자와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을 했다. 사람·영화·도시·옷·물건·정치까지 관심 닿지 않는 곳이 드문 그가 세심한 눈길로 읽어낸 인물평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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