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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사회적 참사’ 아이들에 어떻게 알릴까…양육자 ‘마음 건강’도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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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우아영의 키작은 과학

어린이와 재난


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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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어린이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때 더 무서워하고 걱정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2013년 12월5일 저녁 7시, 영국 링컨셔주 사우스페리비의 시골 마을에 험버강이 범람했다. 넘쳐흐른 물은 내륙 방향으로 무려 3㎞를 이동했다. 100여가구가 물에 잠겼고, 이 지역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 3분의 1이 피해를 입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영국 랭커스터대 연구팀과 국제 아동권리 비정부기구 ‘세이브 더 칠드런’은 ‘어린이, 청소년과 홍수 ― 회복 및 회복탄력성’이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 서두에 적은 말은 바로 이 연구에서 헬레나라는 열살 소녀가 힘주어 말한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미디어 끄고, 시민으로 대우해야

2016년에 발표된 위 연구는 정부의 비상대비 정책이 어린이를 적극적인 시민으로 대하기보다는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그저 ‘취약한’ 피해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연구보고서는 홍수 전은 물론, 홍수가 일어난 순간과 그 직후에도 어린이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이들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각자가 공동체 회복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또 어린이 본인에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나 장소, 친구 관계 등 어린이가 겪은 상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홍수가 났을 때 어린이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 실제로 어린이들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 또한 보여줬다.

이 모든 이야기가 비단 홍수에만 적용되는 건 아닐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산불, 폭염, 태풍, 허리케인, 붕괴, 지진, 침몰, 테러공격 등 어린이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재해와 대형 재난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 정보는 중요하지만, 미디어는 끄는 게 좋다. 특히 어린이는 재난 상황을 뉴스로만 접해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피티에스디)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는 재난 상황과 지리적으로 가까울수록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봤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 공격 직후, 기존 재난심리학 모델이나 피티에스디 발병 모델로 설명되지 않는 다수의 환자가 발생했다. 미디어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퍼진, 끔찍한 참상이 고스란히 기록된 영상에 노출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 이후로 재난 상황과 미디어 노출, 그리고 어린이 정신건강의 상관관계를 밝히려는 연구가 많이 이뤄졌다. 한 예로, 2017년 미국 플로리다를 강타한 역대급 허리케인 어마(Irma) 이후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9~11살 어린이 400여명의 심리 상태를 비교한 연구가 있다. 분석 결과, 피해 지역에서 약 4800㎞ 떨어진 지역의 어린이 일부가 잠을 못 자거나 감정적 고통을 호소하고 기억을 잘 못하는 등, 피해 지역 어린이와 비슷한 피티에스디 증상을 보였다. 텔레비전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접한 재난 뉴스가 원인이었다. 뉴스를 많이 접한 어린이일수록 증상이 더 심했다. 이 어린이들은 두려움과 위협을 감지하는 뇌 부위인 편도체에 강한 반응이 나타났고, 정서적 각성을 가라앉히는 안와전두피질의 활동은 부진했다.

임박한 폭풍이나 화재에 대한 정보를 계속 확인하고 어린이에게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콘텐츠에 장기간 노출되면 사실상 행동으로 옮길 만한 추가 정보가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두려움을 자극하는 재난 뉴스를 어린이 눈앞에 끊임없이 틀어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양육자의 심리상태가 중요

미디어만 끈다고 다가 아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은 정책 입안자가 아니고, 다름 아닌 어린이의 직간접적인 보호자이자 양육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비상 상황에서 향후 어린이가 보일 반응은 양육자의 심리, 감정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9·11 테러에 직접 노출된 18~54개월령의 미취학 어린이 116명과 그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어머니가 피티에스디와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 자녀가 심각한 공격성, 불안, 우울증, 수면 문제 등 임상적으로 심각한 문제 행동을 보이는 비율이 더 높았다. 재난에 직접 노출된 것보다 어머니의 재난 관련 심리적 문제가 미취학 어린이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타난 이유를 추측해 보면,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인 어머니는 재난에 노출된 어린 자녀들이 잘 극복하도록 적극 도왔을 것이다. 반대로 어머니 본인이 피티에스디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면, 자녀들의 회복을 잘 돕지 못했을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한편으로 이 연구 결과를 곱씹게 되는 이유는 재난 상황이 아닌 일상 상황에서조차 양육자들이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상태를 얼마나 뒷전으로 여기는지가 떠올라서다. 재난이나 대형 참사 상황에서 ‘나’는 얼마나 미디어를 멀리하고 ‘내’ 정신건강을 부여잡고 어린이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가.

어린이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느끼고, 안다. 7~11살 어린이와 양육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보면, 양육자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황에서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고 대화에 임한 경우 자녀는 외부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스트레스 징후를 더 많이 보였다.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괜찮을 거야’라고 안심시키기보다 어린이가 느끼는 감정을 존중해주는 편이 더 위안이 될 것이라고, 연구팀은 밝혔다.

2022년 10월29일. 늦도록 잠들지 않았던 탓에 날짜를 넘겨 새벽 내내 늘어가는 사망자 숫자를 바라봤다. 감히 그 고통을 가늠할 수 없지만, 자식을 앞세운 부모들이 떠올라 가슴이 죄여왔다. 온 나라가 슬픔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만 네돌의 아이에게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많은 죽음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침착하게, 사실에 입각해 설명하라는 전문가 권고가 지금껏 많이 나왔지만, 사실 나를 비롯해 개개인은 이런 참사 상황에서 어린이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과학칼럼니스트



육아를 하며 과학 관련 글을 쓴다. 과학 전문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 <아기 말고 내 몸이 궁금해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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