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내게 “너무 애쓰지 말고 살아”라고 말하는 문제적 어른이 나타났다. 나의 시어머니였다. 평생 ‘열심’과 ‘최선’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자란 내게 그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는데, 더 놀란 건 그 말에 터진 내 눈물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거대한 안심이었다. 12월의 크리스마스는 늘 불행했다. 크리스마스에도 당선 전화가 오지 않으면 그해의 신춘문예는 또 낙방이었다. 10년째 낙방하던 신춘문예, 갚을 길이 멀어 보이는 대출금, 자주 반려되던 기획서에 짓눌려 언제든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던 내게 “너무 잘하려고, 너무 다 하려고 애쓰다 마음 다치지 마라”는 그 말은 큰 나무 밑의 그늘처럼 기대어 쉴 수 있는 안전판 같았다.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는 치열한 교육관을 가진 부모님과 달리 “그려, 안뒤야, 뒤얏어, 몰러, 워쩌” 같은 순하고 단순한 할머니의 말을 곁에 두고 산 소설가의 유년기가 등장한다. 이 아름다운 책에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서,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받은 줄도 몰랐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20년 넘게 아흔의 시어머니에게 배웠다. 때로 격려와 기대가 자식을 숨 쉬지 못하게 하는 부담과 죄책감이 될 수 있다는 걸 통달한 어른이 주는 그 무심한 다정을 원 없이 받은 것이다. 비싸고 좋은 물건이니 아껴서 조심히 쓰라는 말보다, 깨져도 괜찮으니 마음껏 쓰라고 말하는 어른은 얼마나 희귀한가. 알아도 모르는 척, 묻지 않는 배려는 또 얼마나 귀한가.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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