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 가치가 하락한 가장 큰 이유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적 통화정책 때문이다. 원홧값은 미국 연준이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리는 ‘자이언트스텝’을 단행한 직후인 지난 9월 22일 13년 6개월 만에 1400원 아래로 내려갔다. 환율은 통화 간의 상대적 가치를 나타낸다. 연준은 물가가 안정되는 것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금리를 인하할 계획이 없다고 못 박았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9월 21일(현지시간)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직후 기자회견에서 “물가 상승률이 연준 목표치인 2%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금리 인하를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원·달러 환율이 상승한 10월 21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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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이 공개한 점도표(연준 위원들이 향후 금리 전망을 보여주는 도표)에 따르면 연준은 올해 말 예상 기준금리를 연 3.4%에서 연 4.4%로 상향 조정했다. 연준이 FOMC에서 자이언트스텝을 단행한 뒤 기준금리는 3.00~ 3.25%로 올랐는데, 2022년 두 차례 남은 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추가로 1.25%포인트 인상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준금리는 9월 기준 2.5%인데, 연준의 자이언트스텝으로 인해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0.75%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앞으로도 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이 예고된 만큼 한미 간 금리 격차는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에서 달러화로 돈을 맡길 시 얻을 수 있는 이자 수익이 더 큰 만큼 달러화 가치는 높아지고, 원화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성장률 저하도 원화 가치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나라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면 중국에 제품을 수출하는 우리나라 기업 실적이 악화하기 때문이다. 외화 수급 측면에서도 악재이면서 동시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우리나라 주식 시장을 빠져나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중국국가통계국에 따르면 2분기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0.4% 증가했다. 이는 1분기 성장률(4.8%)보다 크게 줄어든 것이고, 시장 예상치(1.0%)보다도 낮은 것이다. 중국의 GDP 성장률은 코로나19가 발생한 2020년 1분기 이후 가장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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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국 상황도 악화
중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된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엄격한 ‘제로코로나’ 정책을 시행하며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도시를 봉쇄하는 것이 경제 활력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인 헝다가 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진 데 이어 유동성이 부족해진 부동산 건설사들이 공사를 중단하며 부동산 경기가 침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유럽의 상황도 만만치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와 유럽의 서방국 간 갈등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는 서방국에 대한 경제 보복 차원에서 독일로 연결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점검 등을 핑계로 폐쇄했다. 유럽의 천연가스 가격은 1년 전보다 1000% 이상 상승하는 등 에너지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다. 유럽의 에너지난이 경제 위기로 번질 조짐이 보이자 유로화 가격은 폭락하고 있다. 유로와 달러의 1대1 등가 교환을 의미하는 패리티 붕괴가 20년 만에 나타나기도 했다.
영국의 파운드화도 가파른 하락세가 나타나고 있다. 리즈 트러스 신임 영국 총리가 50년 만에 최대 규모의 감세안을 발표하자 글로벌 금융 시장이 요동쳤다. 파운드화는 37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고, 영국 10년물 국채금리도 최고치로 치솟았다. 감세로 인해 안 그래도 심각한 인플레이션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국 경제 상황이 악화되며 달러화는 독주하고 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 인덱스는 9월 말 114대로 올라서며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우리나라 경제 상황도 녹록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8월 우리나라 경상수지는 30억5000만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상품수지가 44억5000만달러 적자로 전환한 것이 경상수지 적자의 주 요인으로 지목된다. 수출은 1년 전보다 7.7% 늘었지만 수입이 무려 30.9% 증가하며 적자가 발생했다. 수입 증가는 원자재 가격이 상승한 데 따른 것이다. 석탄이 작년 같은 달보다 132.3%, 가스는 117.1% 증가했다.
▶수출 부진도 한 원인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6개월 연속 적자를 이어가고 있다. 무역수지가 6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한 건 외환위기가 촉발되기 전인 1997년 5월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 영향으로 원자재 가격이 치솟으며 무역수지 적자가 개선되기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수입 물가 상승률이 1%포인트 높아지면 무역수지는 8억8000만달러 적자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위기 직전에는 53개월간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했기 때문에 최근의 무역수지 연속 적자를 우려스럽게 보는 시각이 많아지고 있다.
수출 전망도 좋지 않다. 한국무역협회와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발표한 올 4분기 수출산업경기전망지수(EBSI)는 84.4로 3분기(94.4)보다 10포인트 더 하락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0년 2분기(79) 이후 가장 최저치다. ESBI지수는 다음 분기 수출에 대한 기업 전망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100을 밑돌면 전 분기보다 수출이 안 좋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뜻이다.
다만 달러당 원홧값이 1400원 아래로 내려가도 과거와 같은 경제 위기까지 번질 위험은 낮다는 것이 정부의 시각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0월 6일 출입기자단과 간담회에서 “국제기구나 신용평가사 등 국내외 여러 전문가의 얘기를 종합하면 외환위기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밝혔다.
외환위기 발생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이 과거 대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발생 당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1997년 12월 기준 204억545만달러에 불과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3월엔 외환보유액이 2063억4048만달러였다. 2022년 8월엔 금융위기 당시보다 2배 가까이 늘어난 4364억3214만달러를 보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우리나라 순대외채권 규모도 외환위기 당시(1997년 4분기) 마이너스 638억달러로 순채무국에 속했다. 하지만 현재 순대외채권 규모는 2022년 2분기 기준 3861억달러 규모로 넉넉한 수준이다.
주요 수출 대상국들의 경기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어 수출 감소세가 당분간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진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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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외환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가능한 조치를 모두 동원하고 있다. 지난 9월 외환당국(기획재정부·한국은행)과 국민연금공단은 100억달러 한도 내에서 통화스와프를 체결하기로 했다. 계약이 체결되면 국민연금은 100억달러 한도 내에서 6개월 또는 12개월로 한은에서 달러를 조달할 수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 시 외환 시장에서 직접 달러를 매수해 원화 하락 압력을 가중한다는 우려에서 나온 조치로 해석된다.
이 외에도 정부는 조선사의 선물환 매도를 지원해 외환 시장을 안정시키기로 했다. 외환당국은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을 활용해 선물환을 직접 매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조선사는 통상 수주대금을 장기간에 걸쳐 받는데,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막기 위해 미리 선물환을 매도한다. 문제는 선물환 매도 시 거래 은행이 조선사가 신용거래를 한 것으로 기록해 추가 선물환 매도가 나오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부는 연말까지 80억달러 선물환 매도 물량이 외환 시장에 공급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부가 직접 물량을 쏟아내며 시장에 개입하는 경우도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외환 시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달러당 원홧값이 1400원 아래로 하락하자 장 마감 직전 종가 관리를 위해 정부의 대규모 매도 물량이 공급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이 같은 실개입 영향으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이 9월 한 달 새 200억달러 가까이 줄어들었다. 이 같은 감소 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3년 11개월 만이다. 다만 외환보유액이 지나치게 줄어들면 대외 건전성이 악화돼 외국인 자금이 급격히 빠져나갈 수 있다.
추 부총리는 기자간담회에서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외환보유액 대비 줄어든 비율을 보면 그때(2008년 금융위기)와 비교도 안 되게 상대적 비율이 낮다”고 말했다. 그는 “그사이 우리 외환보유액이 많아져서 4300억달러 넘는 수준에서 196억달러 줄어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런던의 한 환전소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재정 악화·물가 상승 우려에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영국 파운드화의 달러 대비 환율은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 <사진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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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가격 반전 모멘텀 없다
당국이 환율 방어에 적극 나선 것과 함께 각국이 금융 시장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움직인 영향으로 달러당 원홧값은 10월 들어 반등하기 시작했다. 10월 6일엔 서울 외환 시장에서 장중 한때 달러당 원홧값이 1300원대로 오르기도 했다. 원홧값이 1400원 아래로 떨어진 지 약 2주 만이다. 중국 정부가 제20차 공산당 전국대회를 앞두고 외환 시장 관리에 나서며 위안화 가격이 상승하자 원화도 이에 동조화 현상을 보였다는 분석이다. 앞서 달러당 위안화는 2008년 2월 이후 최저치인 7.21위안까지 내려갔지만, 10월 6일엔 7.04위안까지 상승했다. 영국이 대규모 감세안을 철회하면서 국제 금융 시장 불안 요인이 일부 해소된 것도 외환 시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다만 이 같은 원홧값 상승은 9월 한 달간 나타났던 급격한 하락에 대한 일시적 되돌림일 수 있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 연준은 점도표에서 올해 말까지 기준금리 전망치 중간값으로 4.4%를 제시했다. 현재 미국 기준금리(3.00~3.25%)보다 1~1.5%포인트 더 인상할 가능성이 남은 것이다. 연준 위원들도 기준금리 추가 인상 필요성을 강조하며 일각에서 제기되는 속도 조절과 관련한 기대감을 일축하고 있다.
백석현 신한은행 연구원은 “9월에 시장 쏠림이 워낙 심했기 때문에 최근 원홧값 반등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며 “美 연준 위원들도 긴축적 통화정책에 대한 입장 변화가 없기 때문에 원홧값이 강세로 돌아섰다고 보기는 이르다”라고 설명했다.
[김유신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6호 (2022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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