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국립극장서 예술원 연극포럼 개최
'매혹으로서의 연극, 네 배우의 모놀로그'
예술원이 10월 26일(수) 오후 3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예술원 연극포럼 ‘매혹으로서의 연극, 네 배우의 모놀로그’를 개최했다. 원로 연극 배우 박정자, 오현경, 손숙(사진), 이호재가 각자의 대표작 중 한 대목을 모놀로그 형식으로 무대에 올려 자전적 연극론을 펼쳤다. 사진 대한민국예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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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짊어지고 가려니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죠. 홀려있으니까 그 고통을 참고 견디는 거겠지요.”
연극계 대모 박정자(80)는 56년 배우 인생을 “내가 홀려서, 나를 통해서 사람들을 홀리는, 매혹시키는 일”이라 함축했다.
원로 연극배우 박정자‧오현경(86)‧손숙(78)‧이호재(81)가 26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예술원 연극포럼 ‘매혹으로서의 연극, 네 배우의 모놀로그’를 통해 자전적 연극론을 펼쳤다.
예술원은 매년 부문별로 회원들의 무용공연, 연극공연, 영화 회고전 등을 개최해왔다. 올해는 네 배우가 각자의 대표작 한 대목을 모놀로그 형식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들과 함께 예술원 회원인 연출가 김정옥‧임영웅이 예술감독, 극작가 윤대성이 극본, 연출가 손진책이 연출에 참여했다.
이들은 50~60년을 연기에 바친 배우들이다. 가장 경력이 긴 오현경은 1961년 KBS 드라마국 개국 탤런트로 데뷔했다. 학창 시절 아마추어극 경력을 빼고서다. 직접 고른 대표작 장면과 이어진 토크 주제에 반세기 연기론이 녹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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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편 넘게 출연 박정자 '인생 장면'은
박정자는 140편 넘는 연극 출연작 중 2019년 고연옥 작, 한태숙 연출로 올린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를 골랐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모티브로 그가 주연을 맡아, 남편 사도세자를 떠나보내기 전후 시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담은 작품이다. 희미한 빛이 정갈하게 들이치는 무대 위 구중심처로 혜경궁 홍씨의 타는 속내가 박정자의 묵직한 음성에 고스란히 실려 왔다.
배우 박정자가 26일 국립극장에서 '꿈 속에선 다정하였네' 한 장면을 모놀로그로 연기하고 있다. 사진 대한민국예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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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토크에서 그는 배우가 된 순간을 ‘해변의 달빛’에 빗댔다. 인간 박정자의 삶이 역사의 풍랑 속에 배우로서 꽃핀 찰나였다. 한국전쟁 당시 1‧4 후퇴 피란길에 한밤중 배에서 내린 곳이 제주도 성산포였단다. 그는 “전쟁이 지금 생각해도 비극적인데 그 달빛이 너무 영화 같았다. 그 새벽 보따리를 짊어지고 배에서 내릴 때 물은 얼마나 맑았는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 겨울 바다, 달빛을 잊지 못한다”면서 “제주 피난 시절 천막 교회에서 크리스마스에 춤추고 노래했고 그게 저의 첫 무대”라 돌이켰다.
오현경은 2009년 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로 공연한 연극 ‘봄날’을 선보였다. 시골 동네의 늙은 홀아비가 젊은 여인을 안고 자면 회춘한다는 말을 믿고 아들이 짝사랑하는 동녀를 방에 끌어들이는 과정을 해학적으로 그린 장면이다. 일제 강점기 경성(서울) 출생으로 한국전쟁 등 현대사의 격랑을 관통하며 TV‧연극 무대를 오간 그는 토크에서 ‘배우로서의 자존’을 이야기했다.
“연극은 배우와 객석이 무대를 놓고 서로 감정을 교류하는 것, 몸짓과 말로 하는 예술이다. 이 원칙은 한 번도 바뀐 적 없다”면서 “발성과 정확한 표준 발음, 대사 분석” 등 기본기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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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 "한달만에 장관 사표…연극으로 치유"
배우 오현경은 26일 이강백 연극 '봄날' 대목을 선보였다. 사진 대한민국예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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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소설 원작 연극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의 한 대목을 선보인 손숙은 “연극은 뒤틀리고 무너진 인간들도 이해해 보겠다고, 용기 있게 달려드는 일이다. 거기에 연기의 매력이 있다. 다양해야 한다”는 철학을 폈다.
‘인간, 두려움과 매혹’이란 주제로 진행한 토크에선 김대중 정부 때 환경부 장관에 올랐다가 러시아 공연 무대에서 받은 격려금이 논란이 돼 한 달여 만에 물러난 것을 회상하며 “미칠 것 같았다. 억울한 걸 어떻게 표현할지, 아파트에서 떨어지면 죽겠지, 한두 달 매일 그 생각을 하며 울었다. ‘뇌물 받은 여자’가 됐다”면서 자신을 살려낸 게 “다시 시작한 연극”이라 했다.
“무대에 서는 시간이 나를 치유하고 반성시키고 발전시킨다”는 그는 “80이 다 돼가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랑쉬다.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욕망의 도구를 한번 끄집어내 표현해보면 어떨까 욕망한다”고 했다.
이호재는 1963년 연극 ‘생쥐와 인간’을 통해 알려진 뒤 연극‧영화를 넘나 들며 연기를 해왔다. 이날 1994년 극단 미추에서 공연한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를 선보인 그는 60년 배우 인생에서 맥베스만 네 번을 했다. 오랜 세월에서 얻은 연기 철학을 ‘무의미와 마주하기’라 짚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을, 관객들이 평가해주길 바란다. 그걸로 기쁜 것이지, 뭘 바라는 건 없다. 뭘 얻고 이루겠나. 다 헛소리”라면서다. “앞으로 할 수 있다면 즐거운 연극을 하고 싶습니다. 그 시간 웃고 서로 즐겁고 그러다 끝나면 그걸로 좋겠습니다.”
배우 이호재는 26일 연극 인생에서 4번 만난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 장면을 선보였다. 사진 대한민국예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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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배우의 모놀로그 이후, 예술원 문학·미술·음악 분과 회원 이근배·이종상·신수정이 ‘내가 바라본 연극 이야기’라는 주제로 관객과 대화를 나눴다. 예술원 측은 “연극은 배우와 관객이 직접적으로 대면해 교감하고 감동을 주고받는 예술 행위인데 그동안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단절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다”면서 “이번 공연은 그동안의 문화적 갈증과 욕구를 해소해주는 기회이자, 관객들과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교감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연극의 당위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됐다”고 밝혔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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