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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말이 문제였다”…노무현의 회한과 윤 대통령의 비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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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448

대통령의 비속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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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약식 기자회견을 한 뒤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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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실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닙니다. 인간 그 자체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그가 구사하는 언어에서 그의 정신세계가 드러납니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대통령다운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문제의 발언을 행사장에서 걸어 나오면서 옆에 있던 박진 외교부 장관, 뒤에 있던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에게 했습니다. 혼잣말이 아닙니다. 사적 발언이 아닙니다. 공적 장소에서 공적 참모들과 나눈 공적 발언입니다.

‘바이든’인지 ‘날리면’인지가 본질이 아닙니다. ‘이 ××들’, ‘쪽팔려서’가 본질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번 사건은 윤석열 대통령 비속어 사건입니다. 김은혜 홍보수석 설명대로 윤석열 대통령이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말했다고 쳐도 ‘이 ××들’과 ‘쪽팔려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국가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향해 ‘이 ××들’이라고 했다면 국가의 기강을 문란하게 한 국기 문란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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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훼손” 어안벙벙한 해명


아무리 그래도 윤석열 대통령이 “욕설과 비속어를 사용해서 죄송하다”고 신속히 사과했으면 파문이 가라앉았을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본래 말을 좀 함부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 국민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틀림없이 미국 의회를 ‘이 ××들’이라고 했고, 틀림없이 ‘바이든’이라고 했다”고 끝까지 주장해서 한-미 관계를 악화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못나도 우리나라 대통령입니다. 국익 앞에서 정파적 이해는 접는 것이 상식입니다.

저는 윤석열 대통령이 사과나 유감 표명 정도는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최소한 그 정도 양식은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귀국 뒤 처음 출근한 지난 26일 아침 기자가 순방 중 발언 논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준비된 답변은 대략 이렇게 나왔습니다.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한다는 것은 국민을 굉장히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그 부분을 먼저 얘기하고 싶다. 나머지 얘기들은…. 먼저 이 부분에 대한 진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 장면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자신의 욕설과 비속어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하고 엉뚱하게 언론의 동맹 훼손 사건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대통령 비서실은 <문화방송>(MBC)에 보도 경위를 따져 묻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제가 기자를 꽤 오래 했지만, 대통령 관련 보도에 대해 대통령 비서실에서 방송사 사장에게 직접 공문을 보내 보도 경위를 추궁하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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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의도는 비속어 사용으로 구겨진 자신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건져보려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의 그런 선택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비속어 사건은 이제 ‘정권 대 언론’의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국기자협회,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방송기술인연합회, 한국영상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피디연합회 등 현업 언론단체들은 지난 27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욕설·비속어 논란 책임전가 규탄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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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기자협회와 방송기자연합회 등 6개 현업 언론단체는 지난 27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언론탄압 중단을 요구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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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건에 대해 거의 모든 신문의 논조도 윤석열 대통령에게 비판적입니다. 출근길 회견 다음날인 27일 아침 신문 사설 제목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유감 표명도 없이 공감 못할 해명으로 논란 키운 윤 대통령”(경향신문)

“아쉽고 미흡했던 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 해명”(국민일보)

“윤(尹) 사과 없는 “동맹 훼손” 반박…점점 멀어지는 협치”(동아일보)

“윤 대통령도 부인한 비속어 논란, 진상부터 밝혀야”(서울신문)

“거짓 선동인지 거짓 해명인지 신속한 진실 규명 필요하다”(세계일보)

“들리지 않는 대통령 말을 자막으로 보도한 엠비시(MBC), 근거 밝혀야”(조선일보)

“‘막말’ 사과 없이 언론 때린 윤 대통령의 ‘적반하장’”(한겨레)

“윤(尹) 사과 없이 언론 탓…비속어 논란 넘겠나”(한국일보)

<중앙일보>는 27일치 신문에 관련 사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루 전인 26일치 신문에 “윤 대통령 해외 순방, 여야 정쟁은 도움 안 된다”는 제목의 사설을 썼습니다. 사설 제목만 살펴도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과 확실히 논지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일보> 27일치 ‘김대중 칼럼’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들’이라는 비속어를 썼다는 것을 문제 삼는데 대통령으로서 그런 표현을 안 했으면 좋았겠지만 공석(公席)이 아닌 사석에서 자기들(참모들)끼리 그런 표현 쓴 것이 그렇게 공노(共怒)할 일인가?”

“일생을 범죄자 또는 혐의자들만을 다뤄온 ‘검사’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우리다.”

“이번 ‘말꼬리 잡기’의 진정한 내막은 좌파 언론과 좌파 세력의 ‘윤석열 타도 총공세’의 합작품이라는 데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가 <조선일보>의 극단적 주장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지난 28일 문화방송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했습니다. 29일에는 검찰에 문화방송 사장, 국장, 기자 등을 고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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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서울 마포구 문화방송(MBC) 본사 앞에서 박대출 ‘엠비시 편파·조작방송 진상규명 태스크포스(TF)’ 위원장과 박성중 국민의힘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 권성동 과방위원 등 국민의힘 의원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뉴욕 발언 보도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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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 표명 뜻’ 질문 피해버린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9일 아침 출근길에 이번 사건에 대한 질문을 다시 받았습니다. 기자가 “비속어 논란이 이렇게 장기화할 일인지 모르겠다. 유감 표명 하실 생각 없나”라고 물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자의 질문이 끝나기 전에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러한 고집스러운 태도는 윤석열 대통령을 위기에서 탈출시킬 수 있을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장 국정 지지율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30일 발표한 한국갤럽의 대통령 직무 긍정 평가는 24%로 일주일 전 28%에 비해 4%포인트 하락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경북에서도 35%로 일주일 전 41%에 비해 6%포인트 하락했습니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누리집 참고)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국회의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 의결로 여야 대치가 격화하며 여권 고정 지지층이 결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번 사건은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에 상당히 깊은 내상을 입힐 것 같습니다.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을 강행했을 때 그런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당장 정기국회에서 야당의 협조를 얻지 못하면 윤석열 대통령은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없습니다. 국정이 마비되면 ‘야당 탓’이 아니라 ‘대통령 책임’입니다. 대화 국면으로 정국을 전환하는 것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도 이득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볼 일입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석열 대통령을 방어하기 위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과거 욕설 사건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너무 비겁한 태도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이지 이재명 대표가 아닙니다.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돼서 윤석열 대통령과 같은 사고를 쳤다면 당연히 지탄을 받았을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언어 문제로 구설에 자주 올랐던 대통령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언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사후 자서전 <운명이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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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말이 문제였다. 나는 구어체 현장 언어를 구사했으며 반어법과 냉소적 표현을 즐겨 썼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인권변호사로서 민주화운동을 할 때 이런 언어 습관이 생겼다. 그때는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표현이 필요한 시대였다. 언로가 막혀 있었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사회에서 반정부 투쟁을 하는 데는 그런 어법이 효과가 있다. 야당을 할 때도 억울한 노동자들을 돕는 활동을 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격앙된 때가 많아서 그렇게 했다. 대통령 후보가 되고 선거를 하는 과정에서 언어 습관을 고쳤어야 했다. 권위주의적 대통령 문화는 극복해야 할 문제였지만, 국민들에게 믿음과 안정감을 주는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일을 했어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이 약점을 정말 집요하게 공격했다.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비틀어 보도하고 인용했다. 현장에서는 별문제가 없었던 말도, 언론에서 앞뒤를 잘라내고 보도하면 아주 품위 없는 이상한 말이 되어버리곤 했다. 퇴임한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과 토론을 보았다. 그는 사회적 소수파에 속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지만 매우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다. 나도 그렇게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머리 숙여 사과하고 국정 매진해야


어떻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깊은 회한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고뇌와 결단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조언을 받아들여 앞으로는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국민은 대통령의 사과에 무척 너그러운 국민입니다. 비속어 사건은 이 정도에서 벗어던지고 우리의 목을 조여오는 경제 위기 극복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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