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김호이의 사람들] 원작을 뛰어 넘는 스타 번역가 황석희가 말하는 '번역할 맛'이 나는 영화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황석희 번역가. 그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500편 이상의 영화를 번역했으며 대표작으로는 데드풀 시리즈, 스파이더맨 시리즈, 보헤미안 랩소디 등이 있다. 특히 데드풀 시리즈는 그의 번역 실력을 톡톡히 보여준 작품이다. 그와 지금의 번역의 신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경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Q. 어쩌다가 번역가를 하게 됐나요?

A. 번역가가 되겠다 마음 먹은 적은 없고 대학교 3학년 때, 임용고시 생각을 접은 차에 '옮김 황석희'라고 적힌 책이 한 권 갖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Q. 많은 영화번역들을 하시면서 성덕이 됐던 경험이 있나요? 그 경험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영향을 줬나요?

A. 라이언 레이놀즈가 번역가를 언급해준 적이 있는데 정말 큰 영광이었고 유대감도 느껴지던 순간이었습니다. 배우와의 유대감은 아무래도 그 배우의 작품에 더 성의를 쏟게 되는 편애 같은 감정을 갖게 하죠.

Q. 황석희에게 번역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그리고 때로는 우리 삶에도 번역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 때가 있잖아요. 황석희의 삶을 번역한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도 궁금해요.

A. 번역 작업 자체에 커다란 의미를 두진 않아요. 저에겐 생업이고 당장 제가 할 줄 아는 것 중에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죠. 물론 호구지책 이상의 애착은 있지만 제 운명이라거나 천직이라거나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반면에 번역이라는 행위엔 여러 생각들이 들기도 해요. 번역을 업으로 하면서는 타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적어졌어요. 특히 어머니의 말처럼 제가 가장 오래 들어온 말들은 더 잘 번역할 수 있게 됐죠. 남들은 어머니의 투박한 말들을 어찌 들을지 모르지만 제가 번역해서 듣는 의미는 전혀 다를 때가 있어요. 이걸 타인에게도 적용하면 아무래도 이해의 범위가 조금은 넓어져요.

Q. 번역가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언제 번역할 맛을 느끼나요? 그리고 반면에 번역가로서 딜레마를 느낄 때는 언제이고, 딜레마와 슬럼프가 왔을 때 어떻게 극복을 하시나요?

A.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아무래도 직업인이기 때문에 영화가 흥행해서 제게 영화를 맡긴 영화사에 도움이 됐을 때예요. 한국의 외화 수입 업계는 코로나 이전에도 너무 힘들었고 코로나를 겪으면서는 거의 쓰러져 가는 수준이에요. 그런 사정들 때문에 업계 내에서 정말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고 폐업한 곳들도 많고요. 그래서라도 번역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영화가 흥행하면 보람이 커요.

번역할 맛이 날 때는 당연히 좋은 작품을 맡았을 때죠. 게다가 대본까지 좋으면 번역이 수월하고 기분도 좋아요. 저는 작품을 가려받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맡은 일을 감사히 하는 스타일이라서 받은 작품들 중엔 만듦새가 아주 좋지 않은 것들도 많아요. 그중에 훌륭한 작품을 만나는 기회가 있다면 너무 좋죠.

Q. 번역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A. 최근엔 <파친코> 번역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번역가가 연출자나 작가, 배우들과 소통할 일이 거의 없는데 이번 작업은 시작 단계부터 함께해서 자막 작업에 비해 깊이 관여했거든요. 배우 오디션 단계부터 함께했으니까요.

작품을 만들어내는 분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의견을 나누는 것 자체가 즐거웠어요. 고되기도 했지만 의견 교환이 많을수록, 서로 욕심을 부릴수록 좋은 결과물로 이어지는 일이 많아서 보람차기도 했고요.

Q. 악플에 신경 쓰지 않는 법이 있나요?

A. 악플에 상처를 안 받을 수는 없어요. 그걸 애써 모르는 척 하는 방법은 없고 일리 있게 비판하는 사람들은 쓴소리 해주는 재수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면 좋아요.

Q.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근데 그 의미를 정확히 어떤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번역을 창작이라고 하거나 그건 창작이 아니라고 확실히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근데 각자의 번역관이 다르잖아요. 그래서 번역도 창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제 개인적인 번역관으로는 번역가는 전달자라고 생각을 해서 좋은 번역가는 충실한 전달자라고 생각해요.

Q.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뭔가요?

A.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슬럼프가 왔을 때 본인이 잘 판단을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슬럼프인지, 번아웃인지, 슬럼프의 탈을 쓴 일하기 싫은 나태함인지. 대부분은 일을 하기 싫어서 피하고 싶은 나태함인 것 같아요.

Q. 영어공부를 어떻게 하시나요?

A. 평소 영어공부를 따로 하지는 않아요. 대신 모르는 게 나오면 찾아보죠. 영어공부보다 한국어를 공부할 때가 많아요. 번역가를 직업으로 하고 있으면 영어공부보다 한국어 공부를 할 때가 훨씬 많아요. 욕심 때문에 하는 경우는 있지만요.

Q.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시나요?

A. 이건 저뿐만 아니라 프리랜서 분들은 대부분 시간관리 못해요. 일어나자마자 밥 먹고 일 시작해서 졸려서 쓰러지기 직전에 일을 마무리 하고 자는거죠. 아는 분이 출근하는 복장을 입고 아파트를 걷고 나서 집으로 들어가서 출근하는 것처럼 일을 한다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어요.

아이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시간관리를 해야되는 것 같기는 해요. 저녁 6시부터 9시까지는 아이와 항상 같이 있어요. 시간관리를 못한다고 고민하지 마세요. 모든 프리랜서들이 다 그래요.

Q. AI의 발달로 번역가는 저물어 간다는 말을 해요.

A. AI의 발달로 일자리를 잃는다는 말을 하는데 의외로 그 순위에 번역가는 별로 없어요. 오히려 의사, 변호사, 검사 등이 AI로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말이 많아요. 그 직업이 대체 직업 1순위예요. 부모님께 “AI 때문에 의사, 검사, 변호사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데 하지 말까?”라고 해보세요.

그러면 “그게 얼마나 좋은 직업인데 뭔 소리야”라고 할 거예요. 애초에 그 직업을 하지 말라는 이유에 AI는 핑계에요. AI가 여러 분야를 잡아먹는 건 맞아요. 근데 그게 일자리를 완전히 빼앗지는 않아요.

Q. 인간관계 관리를 어떻게 하시나요?

A. 인맥관리라는 게 저는 영상번역을 하잖아요. 두줄의 승부사 라는 다음 카페가 있는데 2007년에 제기 만들었어요. 한국에 있는 유일한 영상 번역 커뮤니티예요. 프로 번역가만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 커뮤니티에서 얘기를 나누면서 인맥을 쌓는 거죠. 처음에는 10명이서 만들었는데 제가 경력이 제일 없었어요. 4년 동안 운영을 하면서 경력이 가파르게 올라갔어요. 그런 것처럼 네트워크를 쌓는 게 중요해요.

Q. 번역을 하면서 의도치 않게 스포 당한 적이 있나요?

A. 스파이더맨 홈커밍 예고편을 작업하는데 예고편 첫 씬에서 아이어맨이 죽어있는 거예요. 근데 나는 영화를 보지도 않았는데 아이어맨이 죽어있는 걸 보면서 당황했었어요.

Q. 번역 업계 입문 후 어떻게 번역 실력을 다졌나요? 번역가님만의 방법이 궁금해요.

A. 멍하게 있지 않는 게 답인 것 같아요. 결과물에 대한 판단을 받을 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를 때도 있고 호평을 받을 때도 있는데 호평을 받으면 다음번에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다시 쓰는 거죠. 반응이 안 좋을 때는 그런 식의 번역은 안 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실력이 느는 거죠.

Q. 평가를 받는 직업이기도 한데요. 휘둘리지 않는 법이 있나요?

A. 평가를 받을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안 받을 때가 없어요. 감수자들이 하는 감수는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마세요.

Q. 많은 보수를 얻을 수 있는 일VS내가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일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떤 일을 하실 건가요?

A. 이런 고민까지 하지 않았어요. 저는 일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너무 괴롭고 힘들고 자기를 학대하면서 일을 하는 편이에요. 결과물을 보면 행복하죠. 일을 주시는 것에 너무 감사하고요.

Q. 번역을 할 때 속도가 안 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A. 제가 처음 번역을 할 때 1분을 번역하는데 2시간이 걸렸어요. 지금은 제가 번역하는 속도가 저보다 빠른 사람이 한명 있어요. 제가 처음에 케이블 TV에서 일 할 때 영화 한편을 이틀에 번역해야 안 굶고 살 수 있었어요. 그 속도에 8년을 하다보니까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감지덕지 하고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제가 1분에 2시간 걸렸다는 걸 기억하시고 실망하지 마세요.

아주경제=김호이 객원기자 coby1@ajunews.com

- Copyright ⓒ [아주경제 ajunews.com] 무단전재 배포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