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명동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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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시장이 폭풍 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다. 29일 미국 달러당 원화 가치는 1340원과 1350원 선을 단숨에 뚫고 추락했다. 1350.4원으로 마감했는데 전 거래일(지난 26일) 대비 낙폭은 19.1원에 이른다. 원화 값은 금융위기 후폭풍이 한창이었던 2009년 4월 이후 1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이날 방기선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시장상황점검회의에서 “시장에서 과도한 쏠림 현상이 나타날 경우에 대비해 시장 안정을 위한 정책적 노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며 구두 개입성 발언을 했고, 외환 당국이 실제 매도(달러화를 팔아 원화 가치 상승을 유도하는) 개입에도 나섰지만 1350원 돌파를 막지 못했다. 원화 투매가 이어지며 장중 1350.8원을 찍기도 했다.
’바닥은 아직’이란 공포가 시장에 번지고 있다. 지난주 잭슨홀 미팅에서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매파 본능’을 확연히 드러내면서 달러화 몸값은 치솟고 원화 가치는 속절없이 추락 중이다. 환율 수준만 놓고 보면 이미 금융위기급이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
물론 2007~2008년 금융위기 때와 견줘 한국의 경제 체력(펀더멘탈)은 확연히 나아졌다. 올해 상반기 경상수지는 248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2007년과 2008년 2년 연속 경상수지 적자(각각 상반기 기준)였던 것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올 7월 말 외환보유액은 4386억 달러로 금융위기 때의 2배 안팎에 이른다. 1년 이내 갚아야 하는 단기외채 비율은 6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 대비 41.9%로 10년래 최고 수준이긴 하지만 2007년 63.3%, 2008년 74%를 크게 밑돈다.
국가 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인 외국환평형기금채권(5년물 기준) 스프레드 역시 올 1~6월 평균 38bp(1bp=0.01%포인트)로 아직 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외평채 스프레드는 미국과 한국 국채 간 금리 차이를 뜻하는데 국가 신용도가 나쁠수록 수치는 올라간다. 금융위기 한창이었던 2008년 외평채 스프레드는 연평균 404bp에 달하기도 했다.
이런 거시 경제 지표를 근거로 정부는 경제위기론에 선을 긋고 있다.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제기구나 미국 등 주요국에서 한국을 평가할 때 외환 건전성에도 문제가 없고 충분한 외화보유고도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평가한다)”며 “무역수지 적자가 곧바로 경상수지 적자를 증폭시켰던 IMF 위기 때와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
하지만 과거 위기와 양상이 다르고 거시 건전성 지표가 양호하다는 이유로 섣불리 안도할 상황은 아니다. 똑같은 형태의 경제위기가 반복된 적은 한 번도 없어서다. 한국 경제를 휘청이게 한 1970~80년대 오일쇼크,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모두 달랐다. 원인, 충격 강도와 범위, 회복 기간은 제각각이었다.
외환위기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일부 국가의 문제였고, 금융위기는 미국 내부의 부동산ㆍ금융 부실이 진앙이었다. 이번엔 다르다. 코로나19 후폭풍, 공급망 교란,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 기록적 가뭄 등 여러 위험 변수가 한꺼번에 닥쳤다. 유럽ㆍ일본ㆍ중국 등 선진ㆍ신흥국 가리지 않고 영향권에 있다.
한국도 물론이다.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5%대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폭풍 한가운데 있다. 정부 경계감도 이전보다 한층 높아졌다. 방 차관은 이날 회의에서 “최근 한국 금융시장이 미국 등 주요국 금융시장과 동조화가 심화된 측면이 있으므로 당분간 시장 상황에 대한 주의 깊은 모니터링과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환율 자체보다는 경기 둔화에 취약한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 외환ㆍ금융위기 때보다 크게 불어난 가계부채 등이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외화 유동성 지표를 살펴보면 지금의 원화 가치 급락은 이전 위기 때와 같은 달러화 부족 등 유동성 문제에 기인한 것 아니다”라며 “금리를 거꾸로 내리고 있는 일본의 엔화를 제외하곤 한국 원화가 주요국 통화 중 가장 많이 하락하고 있는데,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미국 긴축으로 인한 성장 둔화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돼 있다는 대외 인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어 “현재 한은이 미국 Fed를 따라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외환시장 안정엔 기여할지 몰라도 가계부채 상환 위험이 커지는 게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2008년 금융위기엔 한ㆍ미 통화스와프 ‘한 방’으로 외화 유동성 문제를 해결했지만, 지금은 유동성이 문제가 아닌 데다 미국과 통화스와프를 맺고 있는 기존 선진국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등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강 교수는 “물가 상승, 원화 가치 하락, 금리 인상은 예상보다 길게 이어질 수 있어 대비가 필요하다”며 “큰 고통을 겪을 서민ㆍ중소기업은 결국 재정 지원으로 뒷받침해야 하는데 현 정부의 재정 긴축 기조, 국가채무, 혼란한 리더십 등 위기 돌파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짚었다.
세종=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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