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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자유인과 호구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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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송나라 소식 ‘설당문반빈로’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하여

조선일보

구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큰 떡깔나무(The Oak at Flagey)'.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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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와서 물었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요, 아니면 절도 있는 사람이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못 미치고, 절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욕망이 깊소. 지금은 고삐 매인 말처럼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상태로 멈추어 서 있으니 뭔가를 얻은 것이요, 잃은 것이요?(客有至而問者曰, 子世之散人也, 拘人也. 散人也而未能, 拘人也而嗜慾深, 今似繫馬止也, 有得乎, 而有失乎.)

-소식(蘇軾), ‘설당문반빈로(雪堂問潘邠老)’

나는 큰 나무를 좋아한다. 너무 커서 다 안을 수 없는 나무를 두 팔 벌려 안고 있으면, 온 우주를 안은 것 같다. 현지 답사를 가서도 큰 나무를 만나면 살포시 안아본다. 그 모습을 보는 학생들은, 오늘도 선생님이 은은하게 미쳤구나, 하는 눈초리를 하며 잠시 기다려준다.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함께 세계 곳곳의 큰 나무를 안아보러 즐거운 답사를 떠날 것이다.

장자의 인간세(人間世)편에 보면, 바로 그러한 큰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제사 지내는 곳에 심겨 있는 거대한 나무를 보고 제자가 아주 좋은 재목이라고 감탄하자, 목수인 스승이 말한다. “그러지 마라. 그렇게 말하지 마라. 저건 성긴 나무다. 저걸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저걸로 관을 만들면 빨리 썩고, 저걸로 그릇을 만들면 빨리 부서지고, 저걸로 문을 만들면 진물이 흐르고, 저걸로 기둥을 만들면 좀이 슬 것이다. 재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아니다. 쓸 데가 없다. 그래서 이처럼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已矣. 勿言之矣. 散木也. 以為舟則沈, 以為棺槨則速腐, 以為器則速毀, 以為門戶則液樠, 以為柱則蠹. 是不材之木也. 無所可用, 故能若是之壽).”

자신을 쓸모없는 ‘산목(散木)’, 즉 ‘성긴 나무’라고 부른 것이 기분 나빴을까. 저 큰 나무는 목수의 꿈에 나타나서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맛있는 과실이 달리는 나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가지를 꺾고 괴롭히니, 제 명대로 죽지 못한다고. 자신은 그 꼴이 되기 싫어서, 일부러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를 원했다고(且予求無所可用久矣). 이 쓸모없음이야말로 자신의 큰 쓸모(予大用)라고. 그러고는 목수에게 되묻는다. “내가 자잘하게 유용했으면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使予也而有用, 且得有此大也邪)”

그 나무가 감탄스러울 정도로 커질 수 있었던 것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능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청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은 오래 살고 이렇게 커질 수 있었다고. 이런 쓸모없음이야말로 어쩌면 큰 쓸모일 거라고. 이런 심오한 가르침을 남긴 뒤, 거대한 나무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너나 나나 다 사물이다. 어찌 사물끼리 이러쿵저러쿵하리오. 너도 죽음에 다가가는 산인(散人) 즉 성긴 사람이니 어찌 산목을 알겠는가?(且也若與予也皆物也, 奈何哉其相物也, 而幾死之散人, 又惡知散木)”

너나 나나 결국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 바로 이 말을 통해서, 큰 나무는 인간이 나무를 향해 누리는 평가 권력을 박탈한다. 눈앞의 나무를 멋대로 베고 자를 수 있는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너도 나처럼 하나의 사물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무나 인간이나 결국 하나의 성긴 존재에 불과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죽게 되어 있는(幾死) 필멸자이기 때문이다. 이 필멸자라는 자각은 여러 세속적 가치나 명예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준다.

‘산목’이라고 불렸던 저 거대한 나무는 이제 거꾸로 목수를 ‘산인(散人)’이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에서 이 산인이라는 말은 일종의 욕이었다. 묵자의 비유(非儒)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군자들이 비웃자 화를 내면서 말했다. ‘이 산인아, 좋은 선비를 몰라보다니!(君子笑之. 散人, 焉知良儒)’” ‘산(散)’이란 글자는 성기다, 띄엄띄엄하다, 치밀하지 못하다, 질서가 없다, 야무지지 못하다, 절도와 훈육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을 담는다. 그래서 산인이란 쓸모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막말에 가까웠던 이 ‘산인’이라는 단어는 점점 그럴듯한 뜻을 갖게 된다. 관직이 없는 지식인, 정치 권력에 다가가지 못한 선비, 은거하는 예술가 등이 겸양의 뜻을 담아 산인을 아호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당나라 때 시인 육구몽(陸龜蒙)은 ‘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자처했다.

실제로 관직이 없는 지식인, 정치 권력에 다가가지 못한 선비, 은거하는 예술가 등은 일상생활에서 자칫 쓸모없는 존재가 되기 쉽다. 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환기하는 데 한 시간 정도 시간을 쓰고, 산책에 진지하게 골몰하며, 특별한 결과를 내지 못할 창작 활동에 몰두하기도 하는데, 정작 집 밖에 나가면 매사에 서툴러서 호구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어느 직장에 가도 위장 취업자 같은 느낌이 물씬 난다. 기껏 집 안이나 학교 안에서나 인간 꼴을 간신히 유지할 뿐이다.

이러한 산인이라는 말에 좀 더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 사람이 바로 송나라의 유명한 문인 소식(蘇軾)이다. 소식의 세계에 이르면, 산인은 거의 자유인이라고 부를 만한 높은 경지의 인물이 된다. 소식이 생각하는 산인은 세속의 명예 따위는 잡을 수 없는 바람이나 그림자 같은 걸로 치부한다.(名之於人, 猶風之與影也) 그러나 현실에 완벽한 자유인이 어디 있으랴. 소식은 손님의 입을 빌려 자문한다. 나는 자유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절도 있는 사람인가.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못 미치고, 절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욕망이 깊지 않은가.

산인이 되고 싶으나 감히 산인을 자처할 깜냥이 되지 않는 나는 산인 대신 ‘마구’를 아호로 사용하곤 한다. 말의 입을 닮아서 마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야구장에서 마구(魔球)를 던지는 강력한 투수이기에 마구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마’포구에 사는 호’구’라는 뜻으로 마구라고 한다. 어디 음식점에 가면 나는 종업원에게 묻곤 한다. “뭘 먹으면 좋은지 추천 좀 해주세요.” 그러면 동행이 이런 호구를 봤나, 하면서 타박을 한다. “식당 입장에서야, 안 팔려서 재고가 가장 많이 쌓인 음식을 추천하겠지. 다시는 추천해달라고 하지 마.” 정말 그런가. 식당에서는 재고가 쌓인 음식을 추천하는가. 정말 그렇다면 나는 호구일 것이다. 마포구에 사는 거대한 호구, 마구 김영민 선생.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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