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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語西話] 왕은 한 명인데 왕릉은 두 곳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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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검진 때문에 두 끼를 굶었다. 일산 동국대 병원의 행정동 이름은 식사동이다. 칠백여 년 전 ‘식사’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한 끼가 간절했던 곳이다. 왜냐하면 왕족도 끼니를 걱정했던 장소인 까닭이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등극(1389년)하고 또 퇴위(1392년)당했다. 그 와중에 잠시 피신까지 하던 시절 그에게 하루 세끼 밥을 제공한 곳은 인근 사찰이다. 그래서 ‘밥절’ 즉 식사(食寺)가 되었다. 절은 이야기만 남긴 채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연의 주인공은 인근에 무덤을 남겼다. 삼복더위가 주춤할 때 왕릉을 찾았다. 새 왕조 조선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면서 고려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태종 이방원은 1416년 공양왕(恭讓王·왕위를 공손하게 양보한 왕)이란 이름으로 능을 다시 정비했다.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유배지를 강원도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으로 옮겨야 했고 왕위에서 물러난 지 3년 만에 마침내 삼척 근덕면 궁촌(宮村)에서 1394년 생애를 인위적으로 마감해야 했다. 이를 애달피 여긴 주민들의 노력으로 숨겨둔 묫자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에 이르렀다. 배롱나무 꽃이 일렬로 줄지어 흐드러지게 핀 끝자리에 안장된 무덤은 총 4기였다. 두 왕자를 포함하여 타고 왔던 말(혹은 시녀 무덤)까지 함께 묻힌 곳이라고 한다. 지역사회 안내문에는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공양왕릉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문헌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진짜 왕릉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수도권 왕릉이 진짜인지 의심하는 눈초리를 지금까지도 거두지 않고 있다.

만약 이장했다면 매장 후 12년 뒤 일이다. 설사 이장했다고 할지라도 원래 무덤 자리는 지역민에게 의미 있는 가치가 그대로 부여된다. 왜냐하면 왕릉의 존재는 처음과 다름없이 그대로 같은 정서로 남기 때문이다. 1837년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이 봉토를 새로 조성했고(허목 ‘척주지’), 일제강점기인 1942년 김기덕(金基悳) 근덕면장은 고려왕릉봉찬회를 구성하여 매년 제향을 올렸으며, 1977년 최문각 근덕면장은 군수의 지시로 묘역을 재단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한 인물에 두 무덤은 전쟁 와중에 더러 있는 일이다. 소설 삼국지의 관운장도 묘가 두 곳이다. 하남성 낙양의 관림(關林·머리 무덤)과 호북성 담양의 관릉(關陵·몸 무덤)이 그것이다. 고려 개국 공신인 신숭겸(申崇謙·?~927) 장군의 무덤도 복수다. 춘천 서면의 공식 몸 무덤과 비공식적인 전남 곡성의 머리 무덤 두 곳이 전해온다. 말이 머리를 물고서 고향 땅으로 가져온 것을 태안사 스님네가 거두어 모셨다고 한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공양왕과 같은 시대를 산 함허득통(涵虛得通·1376~1443) 선사의 부도(무덤 격)는 정수사(강화) 현등사(가평) 봉암사(문경) 등 3곳에 전해온다. 무학 대사의 제자이며 절집 안에서 교과서급 사랑을 받고 있는 ’금강경오가해’를 편집한 공덕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두 무덤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세 무덤도 경우에 따라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관(官)은 관대로 공식 역할이 있고 백성은 백성대로 민심이라는 것이 있다. 또 절집은 절집대로 그 몫이 있기 마련이다. 어쨌거나 공식 기록과 구전을 아우른다면 보이지 않는 사연까지 살필 기회가 된다.

[원철·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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