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신냉전'에 EU 배제…"유럽 분할 위기"
"우크라 분단 막으려면 EU 군사적 억지력 구축해야"
벨기에 브뤼셀의 EU 본부와 EU 깃발 |
(서울=연합뉴스) 송병승 기자 =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럽의 안보 지형이 격변하면서 유럽연합(EU) 내에서 자체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전을 보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위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EU는 정치적 통일체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미국과 러시아 간 '신냉전' 구도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겪었다.
EU의 경제 통합은 완성 단계에 와 있지만, 정치·군사 통합은 상대적으로 더디다.
이 때문에 외교와 국방 정책 등 결정이 빨라야 하는 사안에서 EU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유럽의 한 군사 전문가는 "러시아와 협상에서 EU의 역할이 제한적인 것은 EU가 정치, 군사적으로 통일성이 결여됐다는 방증"이라며 "러시아는 군사·안보 문제에서 EU와 협상할 아무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프랑스의 국제정치 분석가 자크 루프닉은 "최근의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소련이 유럽의 장래를 결정하던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는 "유럽의 안보 지형을 결정하는 협상에 EU가 중립적인 구경꾼이 될 수는 없다. 유럽 안보는 미국과 러시아의 문제가 아니라 EU가 관련된 문제"라고 강조했다.
미쿨라시 주린다 전 슬로바키아 총리는 최근 EU 전문매체 EU옵서버 기고문에서 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토적 야심을 제어하고 우크라이나가 한반도처럼 분단되는 것을 막으려면 EU가 효과적인 군사적 억지력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EU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함으로써 필요할 때 자신과 동맹국을 방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푸틴 대통령이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력한 군대의 지원을 받아야 협상테이블에서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리투아니아에서 훈련 중인 나토 소속 독일군 |
프랑스, 독일 등 EU 주도국도 EU의 방위력 증강을 모색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 방위를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가 진정한 유럽의 군대를 갖겠다고 결심해야 유럽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토 창설 멤버인 프랑스는 1960년대 중반 나토군에서 병력을 철수했다. 그 이후 나토의 정치기구에만 참여하면서 나토와는 별개의 독립적인 방위 기구를 추구해왔다.
독일은 사실상 재무장을 선언하고 군비증강에 착수했다. 또한 독일은 EU 합동군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천명했다.
EU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자체 방위기구 창설을 추진했다.
EU 회원국은 5만∼6만명 규모의 합동군 창설 계획에 합의하기도 했으나 비용 문제 등으로 지금까지 성사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화하면서 EU 내부에서 자체 방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EU는 3월 브뤼셀에서 열린 국방·외무장관 회의에서 2025년까지 5천명 규모의 신속대응군 창설을 규정한 공동방위정책을 채택했다.
EU 각료이사회는 "EU가 시민을 보호하고 국제 평화와 안보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러시아의 불법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에 전쟁이 돌아오고 주요한 지정학적 변동이 초래된 상황에서 이런 우리의 노력은 더욱 중요하다"고 밝혔다.
EU 집행위원회 보안 문서에 따르면 유럽 합동군 창설 계획 초안은 육·해·공군력을 모두 포함하는 신속대응군이 적대적인 환경에서 구조·대피, 또는 안정화 작전과 같은 모든 범위의 군사적 위기관리 임무를 수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군수품 보급, 장거리 공중 수송, 작전 통제 등 독자적인 작전 능력을 보유하는 방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전략적 나침반'이라고 명명된 유럽군 창설안이 확정되면 EU는 2023년부터 정기적으로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계획이다.
EU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계기로 공동방위정책을 진전시키고 있다.
EU는 자체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아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은 개별 회원국의 무기 재고를 통해 이뤄졌다.
EU는 우크라이나로 무기를 보낸 회원국의 무기 재고를 보충하기 위해 EU 예산으로 무기를 공동으로 구매할 계획이다.
EU의 자체 방위력 증강은 나토와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EU는 군대 창설이나 공동 방위비 지출이 나토의 군사력 및 국방 예산과 중복될 가능성이 있고, 나토를 주도하는 미국과 마찰을 빚을 것을 우려한다.
그러나 EU는 EU 군대와 공동 방위비 지출이 나토를 보완하는 것이며 미국 주도의 군사동맹과 경쟁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미국도 나토에 져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어 EU의 공동방위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안보는 유럽이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함으로써 EU의 군사력 강화 노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songb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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