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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日 아베 전 총리 피격 사망

[시선의 확장] 아베 신조의 사망을 걱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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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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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020년8월 24일 도쿄 총리 관저에 도착하면서 취재진을 만나고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8일(현지시간) 나라 지역에서 열린 참의원 선거 유세 중 가슴에 총기 공격을 받아 쓰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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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어느 청년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이 충격에 휩싸였다. 미국 등 서방의 지도자들은 아베의 업적을 찬양하고 명복을 비는 조문을 보낸다. 조문의 내용이 우리에게는 다소 불만이라 해도 고인을 향한 예의라 치부하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 국민과 특히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 윤석열 대통령의 행보는 다소 유감스럽다. 그는 지난 12일 주한일본대사관에 마련된 아베 신조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면서 "아시아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아시아인과 한반도인의 감정을 대표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고 생각한다.

아베 신조가 일본 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열린 김정일, 고이즈미의 북일정상회담이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에 이은 한반도 평화 무드의 연장선이었다. 90년대부터 시작된 북일 국교 정상화 흐름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조국의 분단이 빚은 상처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재일조선인에게는 남북의 평화 무드와 함께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북일정상회담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납치 인정'으로 인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한 북측은 생존자 5인을 귀국을 조건으로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여론은 '납치 문제 해결 없이 국교 정상화 없다'는 데에까지 이르렀고 생존자 5인의 북한 귀국까지 막았다. 북측은 귀국 약속을 어긴 일본을 맹비난했고 양국은 서로를 비난하며 팽팽히 맞선 채 20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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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2차내각 성립 직후 고교무상화법안을 개악하여 조선학교를 영구히 제외한 시책에 반대해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2013년 3월 30일 도쿄. (출처=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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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는 2002년 북일정상회담 당시 고이즈미를 수행해 관방부 장관으로 북에 동행했다. 그는 원래부터 소수파인 '북일 국교 정상화 반대론자'였다. '납치 문제'는 그에게 절호의 찬스였다. 일본의 여론을 '납치 문제 해결 없이 국교 정상화 없다'로 이끈 장본인이면서 동시에 생존자 5인의 북한 귀국을 적극적으로 막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후 수십 년간 평화롭게 오가던 '만경봉호'의 일본 입항 금지,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제재 조치 등 동북아시아의 평화 분위기는 북일 대결 국면 속에서 차갑게 식어간다.

이후 2020년 8월 사임할 때까지 무려 1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아베는 이 '납치 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과업으로 삼아 일본인의 분노를 이끌며 장기 집권에 성공한다. 납치 문제없이 일본 극우의 혐오 시위, 인종차별 시위가 있을 수 없었으며 이 문제 없이 '평화헌법 9조 개정'을 통한 군사 재무장도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는 아시아의 평화를 전제로 한 번영을 가로막은 장본인이다.

재일조선인에게 아베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그는 '납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일조선인 어린이와 청소년을 '인질'로 이용했다. 2002년 9월 이후 일본 사회를 사로잡았던 '납치 문제'라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시선은 '조선학교'로 향했다. 학생들은 거리에서 전차에서 위협과 폭행을 당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국의 조선학교에는 살해하겠다는 협박 전화가 빗발쳤다.

긴장한 동포들은 학교 버스에 인쇄된 '조선학교' 글씨를 테이프로 막았고 통학 전철에 선생이 동승했다. 치마저고리 교복은 그 시절부터 학교 밖에서는 입지 못했다. 인터넷과 SNS에서는 스멀스멀 헤이트스피치가 기어 나오더니 급기야 거리에 욱일기가 등장했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좋은 조선인도 나쁜 조선인도 다 죽이자'는 구호가 외쳐진다. 경찰은 재일조선인의 특권을 허락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의 집회와 행진을 보호하고 이를 막는 카운터 데모대를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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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당시 군경과 양민의 조선인 학살은 6000~2만여 명에 달한다. 내년이면 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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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가 재집권해 2차 내각이 시작되었던 2012년 말, 그 당시까지 난항을 겪던 고교무상화의 조선학교 적용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재집권 후 최초의 정책으로 2013년 초 고교무상화법을 뜯어고쳐 조선학교를 그 적용에서 영구 제명해 버렸다. 이로 인해 조선 학생 249명은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 상대 소송 투쟁을 전개했지만 아베가 교체한 최고재판소(대법원) 재판관들에 의해 패소하고 만다. 아베 집권 시기 조선학교에 지원되던 지방자치체의 교육보조금이 동결되었고, 유치원 무상화에서도 조선학교는 제외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에 신음하던 때에는 대학생 지원금에 조선대학이 제외되었다.

이 모든 '어린이와 청소년'을 향한 법적 차별을 UN 인권위원회의 끊임없는 시정 권고와 국제여론에도 불구하고 밀어붙일 수 있는 힘은 바로 '납치 문제'였다. 납치 문제 해결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아베 신조는 유아,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을 대북 협상의 인질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 '평화' 같은 단어로는 도저히 아베 신조를 기억할 수 없다.

이제 어떻게 될까?
그의 사망 직후 일본 SNS에 잠깐이나마 '범인의 국적을 확인하라'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동시에 그 배후로 재일조선인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말도 떠돌았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99년 전에 관동대지진(1923년)의 충격 때에도 수천수만의 재일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국민 단합을 이끌어냈다. 2011년 3월의 동일본대지진의 충격 때에도 재일조선인을 향한 흉흉한 소문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으레 있는 일이겠거니 하고 바다 건너 우리는 치부하고 만다. 그러나 재일동포 개인들은 아베 신조의 총격 사망 이후 지금까지 심각한 불안 상태에 놓여있다. 이제 일본이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1932년 5월 15일, 급부상하는 군부 세력이 만주사변으로 대륙침략 야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 해군 군축에 불만을 품었던 해군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사살했다. 뒤이어 1936년 2월 26일에는 육군 장교와 부하 1만4000여 명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들은 정부 주요기관을 점령하고 사이토 마코토 전 총리와 다카하시 고레키요 전 총리를 살해한다. 그들이 군에 의해 진압당한 후 군부는 일본 정계를 점령하고 이 세력이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아시아에 일어난 수많은 참상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또 많이 닮았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나토의 아시아로의 확장으로 일촉즉발의 국면이다. 아베 신조의 꿈이었던 일본 재무장은 이제 그의 죽음으로 인해 '유지'가 되어 일본에서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다. 이번 참의원 선거 결과와 기시다 내각의 헌법 개정 선언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아베 신조의 죽음을 애도하고 일본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디 그의 죽음이 어떤 거대한 참상의 방아쇠가 되지 않길 소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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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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