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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하루빨리 서훈·유해환국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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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 100주기

한겨레

김가진 초상, 1910년, <조선귀족열전>,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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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이규수 | 일본 히토쓰바시대 한국학연구센터 교수

100년 전 7월8일,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로 항일독립운동에 삶을 바친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 장례식이 중국 땅에서 치러졌다.

격동의 시대, 김가진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구한말 나라는 풍전등화 처지에 놓였지만, 명문가 출신 관료였던 김가진은 민족의 현실에 눈감고 제국과 식민지를 넘나들며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김가진은 영화로운 삶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그 길은 시행착오로 점철된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이는 당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직면해야 했던 삶 자체이기도 했다.

김가진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조선 귀족에서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자신을 변모시킨 독립운동 세력의 ‘큰 어른’이었다. 고종이 ‘한국 조정에서 가장 총애받는 중신’이라 일컬었던 김가진은 친고종 개화파 일본통 외교관이었다. 국제적 감각을 지닌 외교관으로서 일본 정계 주요 인사들과 마주하면서 한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한국이 독립국임을 강조했다. ‘친일’과 ‘지일’은 엄격히 구별돼야 한다. 일본에 김가진은 ‘사물을 널리 분별하여 변론할 수 있는 독립개화당’이었다. 갑오개혁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결과 한국이 일본의 실질적인 식민지로 전락하자, 김가진은 을사늑약 체결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의병 세력과 보조를 맞추는 형태로 배일 의견을 밝혔다. 각국 공사에게 공동으로 ‘일본의 행동은 한국을 박해하는 것’이라는 호소문을 송부하고 조약 체결에 반대했다. 또 대한협회 회장 자격으로 ‘한국인이 일본인을 배척한 3대 이유’를 통해 한국인이 일본을 배척한 이유를 명확히 했다.

김가진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꿈꾸었다. 3·1운동 당시 김가진은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계획을 세웠으나 관헌에 발각돼 일시적으로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길 모색에 나서, 항일 지하조직인 대동단 총재가 되어 국외로 탈출했다. 김가진은 대동단 조직을 발판으로 삼아 상하이를 무대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대동단이라는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양반과 노비로 나뉘는 신분제를 타파해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항일투쟁에서 하나가 되는 세상을 꿈꿨다.

‘노예적 생활을 보내기보다 독립군의 깃발 아래 깨끗이 죽자’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김가진의 동정을 감시하던 일제 관헌에서는 김가진=대동단의 두령, 대동단=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별동대로 파악했다. 김가진은 “일본과의 혈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기고문을 작성했고, 이를 위한 군자금 모집과 국내 지부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항일무장투쟁을 주장하는 무단파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조직을 이끌었으며 “급거 병력으로 조선 내에 침입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가진은 열악한 망명생활 속에서 바라던 독립을 마주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가진의 장례식은 1922년 7월8일 오후 상하이 쉬자후이의 만국공묘에서 열렸다.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도 특집기사를 통해 김가진의 죽음에 상하이 교민사회가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을 형언하기 어렵다고 당시 상황을 알렸다. 장례식은 독립의 꿈을 이루지 못한 김가진의 삶을 아쉬워하며 독립을 향한 새로운 동력을 찾기 위한 다짐의 장이었다.

그가 세상을 뜨자 임시정부도 국장으로 예우했건만, 100년이 지나도록 김가진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보류돼 환국 절차를 밟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더는 머나먼 이국땅에 방치할 수 없다. 김가진은 독립유공자가 되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누가 시켜서 독립운동에 나선 것도 아니다. 무려 칠순을 넘긴 나이에 처절한 반성을 통해 자신의 변혁을 도모하고 옳다고 판단한 길로 나섰다. 그리고 온 생애를 국가와 민족의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힘썼다.

그런 김가진에 대한 재평가는 시대적 사명이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올바른 판단이 절실하다. 서훈 심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자신의 연구영역에 매몰되는 폐쇄성에서 벗어나 ‘참’역사학자의 눈, 즉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겸허하게 답을 구하는 자세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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