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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인위적이냐 인과응보냐…러시아, 서방 제재로 사실상 디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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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 이자 1억달러 못 갚아

러 “루블화로 낼 것” 버티기

국제 금융시장 영향 제한적 관측


한겨레

지난 23일 브릭스 경제포럼에 참석 중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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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가 외화 표시 국채 이자 약 1억달러(약 1285억원)를 갚지 못해 사실상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지게 됐다. 러시아는 이자를 지급할 수 있는 우회로를 제시하며 반발하는 중이고, 러시아 국내 경제 및 국제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도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2면

27일(현지시각) <블룸버그> 등 외신들은 러시아가 서방 국가들의 경제 제재로 인해 전날 지급 시기가 만료된 외화 표시 국채 이자 1억달러를 지급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러시아가 지급해야 할 이자는 지난달 27일이 만기였지만, 30일의 유예 기간이 있어 26일까지 지불이 마무리되어야 했다. 러시아가 이 돈을 지급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사실상 디폴트 상태에 빠지게 됐다.

채권자의 25% 이상이 동의하면 디폴트가 공식 확정되고, 이후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된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이후 혼란기인 1998년 재정 상황 악화로 외채에 대해 ‘모라토리엄’(채무 지급 유예)을 선언한 적이 있지만, 채무불이행인 디폴트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볼셰비키 혁명 뒤 1918년 사회주의 정권이 제정 러시아 시절 대외 국가 부채를 갚지 않겠다고 디폴트를 선언한 적이 있는데, 러시아에서 이번에 국가 대외 부채 디폴트가 확정되면 10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번 사태는 국제 금융시장을 뒤흔든 다른 ‘디폴트’ 사례와 여러모로 구분된다. 러시아가 위기에 몰리게 된 원인이 외환 위기와 경제난으로 ‘지급 능력’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외환이 충분한데도 서구의 경제 제재로 이자를 지급할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지만, 세계적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인해 외환 사정은 넉넉하다. 하지만 러시아 주요 은행들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이미 퇴출된 상태고, 약 6400억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외환보유고 가운데 상당액도 서구 은행에 동결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디폴트는 미국에 의해 강요된 ‘인위적 디폴트’라 부를 수 있다.

러시아가 2월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미국 재무부는 러시아 정부가 제이피(JP)모건, 시티그룹 등 미국 주요 은행 등과 달러화를 사용해 거래하는 것을 막았다. 러시아가 달러로 국채 원금과 이자를 갚을 길을 차단해 압박하겠다는 의도였다. 미 재무부는 국채 이자비용 등에 대한 금융제재를 5월25일까지 유예했지만 이후 연장하지 않았다. 유럽연합(EU)도 러시아 국가예탁결제원(NSD)을 제재 대상으로 지정해 국제 증권예탁결제기관인 유로클리어·클리어스트림 등으로 자금이 이동하지 못하게 했다. 러시아가 채권자들에게 돈을 지급할 통로가 사라진 것이다. 이 시점에서 사실상 디폴트를 피할 수 없게 됐다.

러시아는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궁 대변인은 27일 “이 상황을 디폴트라 부를 근거가 없다”며 “디폴트 관련 주장은 완전히 잘못됐다”고 말했다. 러시아 재무부도 이날 러시아는 만기 이전에 채무를 상환했지만 “제3자” 때문에 채권자가 돈을 받지 못한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 22일 제재 대상이 아닌 러시아 은행에 외국 투자자들이 계좌를 열면 루블로 이자 등을 지급하고, 이후 투자자들이 이 돈을 달러 등 외화로 환전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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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말리크 루미스세일스앤드컴퍼니 선임 분석가는 <블룸버그>에 “다른 (지불)수단이 있는 정부가 다른 나라 정부에 의해 디폴트에 처해지는 경우는 매우 매우 드물다. 역사상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몇달 전부터 예고된 이 사태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국채의 부도 가능성을 보여주는 신용부도스와프 프리미엄은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러시아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마찬가지다. 일반적 상황이라면 국가 신용도가 추락한 러시아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불가능해지고 여러 가혹한 제재를 떠안아야 한다.

그래도 러시아 국채 보유자 등 투자자들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사태가 러시아 경제에 즉각적 파급 효과를 일으키진 않겠지만, 투자자들이 소송을 제기하면 수년에 걸쳐 진행될 법적 문제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크 위더마이어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법학)도 투자자들이 러시아 정부를 고소할 수 있지만, 이 사태는 “국가 디폴트 케이스 중 가장 법적으로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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