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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미술의 세계

자연과 인간, 오롯한 자유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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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풍경으로의 다이빙

바르셀로나를 지키는 화가 기욤 티오

스페인의 폭양을 특유의 색감에 담아

‘색 면’ 기반의 독특한 화면구성 선보여

인물로 시작, 풍경으로 초점 옮겨 작업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

그의 풍경은 언젠가 방문할 장소 상상

설산 향하는 ‘소풍’속 사람 한없이 작아

작은 인간은 광활한 자연으로 스며들어

그의 작품 속에선 평화로움이 느껴져

세계일보

기욤 티오, ‘DE CAP’(2022). 아트사이드 갤러리 제공


#바르셀로나 화가 기욤 티오

기욤 티오(Guim Tio·1987)는 스페인 출신으로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바르셀로나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졸업 이후 프랑스 파리, 독일 등 유럽 동시대미술의 격변지로 떠나지 않고 바르셀로나에 남아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에는 바르셀로나의 폭양 아래 드러나는 특유의 색감이 담겨 있다. 같은 도시 출신의 호안 미로 작품과 마찬가지로 온기를 지닌 생동감이 느껴진다. 작가는 2012년 바르셀로나 미셀라니아 갤러리(Micscelanea Gallery)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대만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대만에서 특히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2015년 브뤼셀 전시를 시작으로 네덜란드, 중국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했다. 최근 서울의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개인전 ‘선데이(Sunday)’를 마련, 시원한 풍경을 전시해 국내 관람객으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기욤 티오의 그림을 처음 만날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면을 채운 색 면들이다. 그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넓은 색 면 조각들이 모여 조각보처럼 캔버스를 구성한 듯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색 면을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 오간 붓의 흔적과 레이어를 발견하는 것은 또 다른 재미다. 이러한 색 면 기반의 화면 구성은 그의 초기 작업인 ‘매거진(Magazine)’ 연작부터 보였다. 그는 작업 초기에 지금 주로 그리는 풍경 작업이 아니라 인물을 다루는 일을 많이 했다. 패션 잡지 등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 위에 파스텔 또는 오일 물감을 칠하는 식이었다. 남성의 얼굴은 여성의 얼굴로 재구성되었고 코는 빨간색으로 다시 칠해졌다. 이목구비가 명확히 드러났던 구체적 대상은 이를 통해 색과 붓의 흔적을 통해 미지의 인물로 태어나게 되었다. 도발적인 동시에 독특한 작가 작품 특유의 정체성이 나타나기 시작한 연작이었다.

‘매거진’ 연작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은 것은 이와 같은 작품 특성이 형성한 비현실적 장면에서 오는 매력이었다. 이러한 매력은 그가 인물 연작에 이어 시작한 풍경 연작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작가는 2010년대 중반부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본래 주요 대상이었던 인물은 풍경 속에 작은 존재로 그려져 떠도는 듯 화면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새로운 연작에 ‘비현실적 공간(Unreal Space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작품들을 선보인 대만의 이리 아트(Yiri Arts)에서는 새로운 작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설명했다.

”집, 별, 사막-그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작가는 초상화 작업을 사랑하지만, 숨바꼭질을 하듯 그의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는 얼굴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불안전한 것들에 시각적으로 공명에 깊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기욤은 한 명의 관찰자입니다. 그의 작업 과정은 포착된 것을 버려 균형을 창조하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즉 기욤 티오의 작업은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에서 시작해 풍경 그리고 그것들이 공존하는 장면에 이른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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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티오, ‘EXCURSIO’(2022). 아트사이드 갤러리 제공


#고요하고 담담한 풍경으로의 다이빙

기욤 티오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풍경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 비평가이자 독립 큐레이터인 기셀라 칠리다(Gisela Chillida)는 그의 작품의 주제가 인물에서 풍경으로 초점을 옮긴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거 인물을 다루었던 작업이 ‘우리는 어디서 왔을까?’에 관한 숙고였다면 풍경 작업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에 관한 작업이라고. 그래서 그의 풍경화는 사진처럼 포착된 과거의 풍경도, 고개를 올려 바라보는 현재의 풍경도 아닌 현재로 당겨진 미래의 풍경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있으면 관람자는 언젠가 방문했던 장소를 기억하기보다 언젠가 방문할 장소를 상상하게 된다. 상상은 우리를 일상에서 벗어나게 하며 마음껏 숨 쉬고 나르게 한다.

‘엑스쿠르시오(Excursio)’(2022)는 이렇게 보는 이를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카탈로니아어인 ‘Excursio’는 한국어로 ‘소풍’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완만한 경사의 동산들이 펼쳐져 있고 그 동산들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어 멀리 보이는 설산(雪山)으로 향한다. 동산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장면의 시작처럼 보이는 하단의 동산은 초록빛으로 칠해졌다. 들꽃이 떨어진 뒤 남은 짚은 풀잎들이 가득할 것 같은 들판의 모습이다. 그 뒤로 보이는 동산은 노란빛에 녹색이 옅게 비추어 안개 나무로 뒤덮인 듯하다. 동산들 사이에는 침엽수 나무가 군데군데 솟아올라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화면에 재미를 준다. 그리고 이러한 풍경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동산 사이 작게 보이는 어떤 존재다. 가까이 얼굴을 화면 쪽으로 내밀어 보면 그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설산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소풍을 홀로 떠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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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티오, ‘VISTES’(2022). 아트사이드 갤러리 제공


‘비스테스(Vistes)’(2022)도 마찬가지로 동산들이 화면을 둘러싼 그림이다. 대신 여기에는 동산 가운데 너른 호수가 등장한다. 소풍을 떠나 산을 천천히 걸어 오르던 사람도 여기서는 멈추어 호수를 바라본다. 같은 옷을 입고 있어 동일 인물로 생각되는 이 사람은 여기서 후드 티셔츠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주먹을 쥔 채 물을 마냥 바라본다. 깊고 잔잔한 호수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사람은 고요를 전해주는데 고요는 늘 일상과 멀리 있기에 꿈같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앞의 두 그림이 정적이었다면 ‘데 카프(De Cap)’(2022)는 상대적으로 역동적이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너른 물이 펼쳐진 전면. 그 뒤로 낮은 산들이 자리 잡아, 완만한 곡선들의 만남과 멀어짐을 보여주고 그 위로는 물색과 같은 하늘색. 공기마저 멈춘 듯한 이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에 몸을 던져 뛰어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잔뜩 앞으로 쏠린 그의 몸동작은 온 힘을 다해 물로 뛰어들었을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도 몸 모양을 온전히 반영한 그림자는 물이 잔잔하고 파도 치지 않는 상태를 보여줘 그의 다이빙이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그가 몸을 던진 풍경으로의 다이빙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모습이다.

기욤 티오의 최근 작품들은 광활한 자연 속에 작은 인간을 배치하는 방식을 취한다. 때로는 사람이 실제 비율보다 훨씬 더 작게 그려진 듯도 싶다. 그러나 작은 크기의 인간은 나약해 보이기보다 자연에 스며든 듯한 느낌을 준다. 커다란 흐름과 장면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 존재할 뿐이다. 기욤 티오의 작품에서 체험하는 평화로움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의 그림은 시간이 갈수록 수직보다 수평적 선과 구도를 더 많이 보여준다. 수평선은 일반적으로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준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안정감을 주는 선과 형태의 구성에 그는 앞서 언급한 온기를 지니면서도 생동감이 느껴지는 색을 더한다. 요소들은 어우러져 그림 안에 조화와 균형을 만들어내고 포근하면서도 감각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이러한 작가의 능력은 자기 작품을 설명하는 작가 노트에서 쓴 “피부에서 나는 유화 재료의 냄새” 등의 문장에서도 볼 수 있다. 작가의 감수성은 섬세한 지각과 표현력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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