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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특파원 리포트] 물가 공포에 강국끼리 “終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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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파리 집 근처 주유소에서 리터당 2.12유로(약2800원)가 붙은 가격표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리터당 1.60유로(약 2100원)였던 것이 넉 달 만에 30% 넘게 올랐다. 기껏해야 40리터 남짓 들어가는 소형 승용차 주유에 우리 돈 십 몇 만원이 우습게 나가게 됐다.

휘발유 값만이 아니다. 요즘 유럽에선 빵과 채소, 식용유 등 식품 가격부터 온갖 서비스 요금까지 값이 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전기료는 이미 올 들어 두세 차례 오른 데 이어 하반기에 또 인상될 전망이다. 전기료가 지난 1년 새 거의 2배가 됐다. 지난달 유럽 지역의 전년 대비 물가 상승률은 8.1%로 지난해 11월부터 역대 최고치를 매달 경신하고 있다.

당장 생활에 위협을 느낄 수준으로 물가가 치솟으니 민심이 휘청거린다. 식당이나 길거리서 귀동냥을 해 보면 생활비 걱정에 한숨 쉬는 이들이 많다. 높은 물가 탓에 너도나도 씀씀이를 줄이니 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상승) 중에 경기가 위축되는 ‘스태그플레이션’ 공포가 드리운다. ‘외국인 추방’이나 급진적인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는 극우·극좌 포퓰리즘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사회 불안도 커지고 있다. 언론의 분위기도 빠르게 바뀌는 중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우크라이나 부차와 마리우폴의 ‘참극’에 분노하던 이들이 이제는 생활난에 무너지는 자국 국민의 ‘비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국 정부가 나름의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세금 인하나 생활 보조금 지급 같은 뻔한 것들이다. 물가 상승의 주범인 유가와 곡물 가격 급등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 금리 인상으로도 통제가 안 된다. 근본 원인의 해결 외에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유럽은 결국 ‘빠른 종전’으로 돌아서고 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가 ‘평화 협정’을 종용하고 나섰다. 희생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명분과 별개로, 자국 내 민심 이반으로 인한 정치적 타격을 감내하기 힘들다는 속내가 분명해지고 있다. 대러 제재 수위를 높여가는 유럽연합(EU)의 진심은 “제발 이쯤에서 끝내자”일 것이란 말까지 나온다. 미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방장관이 나서서 ‘휴전’을 요구하는 데는 8%대의 물가 상승률에 수십억달러의 전비(戰費) 부담까지 겹친 상황이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이번 전쟁을 단기간에 끝낼 수 있다는 큰 오판을 했다. 기대했던 ‘승리’에서는 완전히 멀어진 상황이다. 하지만 세계인의 민생(民生)을 인질 삼아 ‘탈출구’를 향해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빼놓은 강자들 간의 내부 사정이 이 전쟁을 끝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러시아 편을 든 중국이 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대만과 한반도를 놓고 미국과 맞선 상황에서 이 교훈을 어떻게 활용할지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것이다.

[정철환 유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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