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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차가운 돌도 예술로…60년 펼친 '반전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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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1960년대 초기 작품을 바라보는 한국 전위예술 선구자 이승택 작가. [사진 제공 =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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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아기 궁둥이 같다. 동그스름한 돌에 그저 노끈을 감았을 뿐인데…. 묶으니 되레 자유로워 보였다. 딱딱하고 차가운 돌의 물성에 갇히지 않고 물렁물렁하면서도 따뜻한 생명체로 거듭난 것 같다. 한국전쟁의 상흔에서 채 회복되지도 않았던 1957년, 국내 첫 아방가르드(전위예술) 미술가 이승택(90) 작품 '고드랫돌'(발이나 자리를 엮을 때 감아 매는 데 쓰는 도구)은 반전의 미학을 보여준다. 우리 미술계가 서구 모더니즘을 추종하던 시절 작가는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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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어진 돌`(21×27×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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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갤러리현대에서 개막한 그의 개인전 '(언)바운드'는 평생의 방법론인 '묶기' 연작을 한자리에 모았다. 작가는 1950년대 후반부터 '비조각'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 전통적 조각 재료 대신 옹기, 노끈, 각목, 한지 등 일상 물건으로 전위적 작품을 쏟아냈다. 그의 비조각 개념은 바람, 연기, 불과 같은 자연현상을 순간적으로 시각화하는 퍼포먼스 형식의 '비물질' 연작과 일상 사물을 묶거나 묶은 흔적을 남기는 '묶기' 연작으로 당대 작가들과 차별화했다. 그는 홍익대 조소과에 다니던 1955년 당시 덕수궁에 있던 민속박물관에서 '고드랫돌'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관찰했다. 작가는 "어떤 사물이나 소재건 묶기만 하면 묘하게도 본래의 형상들이 새롭게 느껴진다"며 이후 '반전의 트릭'에 몰두하게 됐다고 한다.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회고전이 이승택의 작품 세계를 날 것 그대로 총체적으로 보여줬다면 이번 개인전은 묶기 작업의 다채로운 변주에 집중했다.

거대한 옹기를 죽순처럼 쌓거나 천장에 줄줄이 매단 '오지' 연작은 압도적인 양감과 세련미를 보여서 1960년대 작품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노끈으로 캔버스나 여성 몸통(토르소) 조각, 도자기, 고서 등을 묶거나 혹은 묶은 흔적만 남기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있다.

작가는 평생 쉼 없이 새로운 소재를 찾고 탐구했다. 아내가 손수 이발해주던 본인의 곱슬머리를 잘 모아뒀다 사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1960년대에 머리털로 붙여 만든 '캔버스 자화상'이다. 본격적으로 작품에 쓰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우리나라 핵심 수출 역군이던 가발산업이 쇠락하는 변화를 체험한 것이 계기였다. 동네에서 "머리카락 파세요"를 외치던 행상이 어느 날 "머리카락 사세요"로 바꾸자 그는 한 보따리를 사서 캔버스에 붙였다. '모(毛) 서예' '털 난 캔버스' '춤' 같은 기상천외한 작품이 별도 공간에 모여있다. 낯선 이미지가 당혹스럽지만, 사물과 예술에 대한 통념이 허물어지게 한다.

국제판화비엔날레에 참가하려고 작가가 1970년 중반부터 만든 종이판화도 흥미롭다. 석고에 종이를 뜨는 방식으로 찍은 부조 같은데 노끈까지 붙이니 에디션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원화가 돼버렸다. 한 판화의 액자 뒷면에는 작품값 10만원이 책정돼 본인 작품을 자식처럼 아꼈던 작가의 자부심이 엿보인다. 당시 은행원 월급이 11만원(1975년 기준)이던 시절이다. 꿋꿋이 독자적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그는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장군 동상 등 구상 조각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다. 서울올림픽공원 평화의문 앞 60개 기둥에 해학적인 민속 탈이 가득한 '열주탈'과 '기와를 입은 대지'도 그의 작품이다.

함경남도 고원 출신 작가는 18세에 월남해 군인이 됐다가 무릎 총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그림을 접하게 됐다. 북녘 어머니와 생이별한 채 서울에 터전을 잡은 그는 반골 기질을 꺾지 않아 평생 미술계 이단아로 남았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 미술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내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릴 예정인 국립현대미술관의 국제 교류전 '아방가르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에도 대표 작가로 참여한다.

마음에 드는 조수가 없다며 평생 홀로 작업해온 그는 구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업실에 모아둔 골동품 더미에서 마음이 끌리는 소재를 골라 하루 1점씩 만드는 '현재 진행형'작가다.

전시는 7월 2일까지.

[이한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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