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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850원 컵라면 받고 되판 아동 성착취물…피해자 고통엔 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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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일반 가담자 1심 판결문 전수 분석]

성착취물 수 천건 구매

“소지했을 뿐 억울” 호소


한겨레

넷플릭스 다큐 <사이버 지옥: n번방을 무너뜨려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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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성착취는 조주빈과 몇몇 주범들만의 범행이 아니다. 2020년 3월 조주빈이 검거될 당시, 엔(n)번방과 박사방을 비롯한 130개의 텔레그램 성착취 대화방에 26만명(추산)에 이르는 ‘얼굴 없는 가담자’들이 있었다. 성착취물을 소지·판매·재유포한 이들은, 조주빈 일당이 성착취 범행을 이어가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지난해 말 조주빈 일당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마무리됐지만, 여전히 법정에서는 얼굴 없는 가담자들의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한겨레>는 조주빈 뒤에 숨은 엔번방 일반 가담자 378명의 1심 판결문 366건을 전수 분석했다.


지난해 12월 서울의 한 법정. 검정색 코트를 입은 ㄱ(34)씨가 피고인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판사 앞에 선 ㄱ씨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음란물 소지) 혐의를 받는다. ㄱ씨는 엔(n)번방에서 만들어진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1317개를 컴퓨터와 휴대전화에 다운로드 받아 소지했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 2월 1심 재판부는 징역 5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억울함을 토로한 ㄱ씨는 항소했다.

ㄴ(38)씨도 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2019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엔번방과 박사방에서 유포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2786개를 다운로드 받았다. ㄴ씨는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다 호기심 때문에 죄를 지었다.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송구한 마음이다. 자책하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ㄴ씨는 판결을 받아들였다.

‘소지범’ 처벌은 강화됐지만


엔번방과 박사방 일반 가담자 378명 중 277명(73.3%)이 성착취 영상을 다운로드 받아 소지했다가 기소됐다. 가장 많은 범죄 유형이다.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유통되는 성착취물 광고를 보고 범죄에 이른 이들이 많았지만, 오히려 엔번방 사건 수사가 시작된 뒤 ‘호기심’에 다운로드 받은 이들도 있었다. 성착취물 수요자는 처벌 받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이 만연해 있음을 보여준다.

ㄱ씨와 ㄴ씨처럼 성착취물을 수천 건 보유하고 있어도 ‘단순 소지’ 사건에는 대부분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엔번방 사건 이전에는 소지자들에게 평균 200만∼300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징역형을 처단형으로 삼은 것은 사법부도 더 이상 소지죄를 가볍게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다만 단순 소지의 경우 수천개의 아동 성착취물을 가지고 있더라도 집행유예에 그치는 점은 한계로 지적할 만하다”고 했다.

실제 <한겨레>가 분석한 판결문 상당수는 “한 번의 범행(다운로드)” “소지 기간이 짧다”는 양형 감경사유를 채택하고 있었다. 김 소장은 “디지털 성범죄는 한번 피해가 발생하면 사실상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 가해자 입장에서 압축파일을 한번 다운로드 받더라도 그 안에 수천개 성착취물이 담겼다면, 수천번의 피해가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다. 무한한 복제 가능성이 열려있는 디지털 성범죄에서 ‘단순 소지’라는 감경사유는 제한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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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원 사발면에 재판매된 성착취물


성착취물 소지에서 한발 더 나아가 판매하거나 유포한 일반 가담자는 378명 중 44명(11.6%)이었다. 이들은 ‘쉽게’ 다운로드 받은 영상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퍼뜨렸다. 대가로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챙긴 경우도 있었지만, ‘문상’(문화상품권)을 받거나 심지어 850원짜리 컵라면 교환권을 받고 성착취 영상을 넘긴 경우도 있었다. 디지털 성범죄 수요자들이 피해자 고통에 얼마나 둔감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법원은 재유포자 24명에게 징역형의 실형을, 20명에게는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33명은 박사방 운영진 지시를 받아 가해 행위에 가담했다. 2019년 12월에 있었던 ‘피해자 실검 챌린지’가 대표적이다. 박사방 운영진은 불법촬영 영상물을 퍼뜨리기 위해 박사방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실검 챌린지를 했다. 피해자 이름이 들어간 특정 키워드가 포털사이트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운영진이 지정한 시간에 박사방 참여자들이 검색창에 집단적으로 특정 키워드를 검색하도록 한 것이다. 실검 챌린지에 가담한 이들은 음란물 소지 및 배포 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들에게 실형이 선고된 경우는 없었다. 벌금형이 3명, 징역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된 이들이 30명이었다.

디지털 성착취물은 한번 온라인에 퍼지면 완전한 삭제가 불가능하다. 끊임없이 소지·배포 범죄가 발생하고, 법정에 서게 되는 이유다. 수사망은 촘촘해 지고 있다. 경찰은 2020∼21년 성착취물 유통 등을 집중 단속해 5200명을 검거하고 342명을 구속했다. 경찰청은 “위장수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국제공조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최민영 기자 my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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