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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詩想과 세상] 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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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경향신문

알면서 모른 척 지나쳐 본 일이 있다

이웃집 언니가 가게에서 초콜릿을 훔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물방울처럼 생긴 눈을 계속 감았다 뜨는데

곧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서
눈동자를 켜고 환해지다가
하나씩 전원을 내리고 어두워졌다

뾰족한 빗방울이 무서워 두꺼운 이불 속에 숨었다
이웃집 언니는 욕실 타일을 하나씩 뜯어 입에 넣어 주었다

깜깜한 바닥을 더듬거리는 동안 균열이 생겼다

축축한 말들이 노랗게 젖어 있었다

성은주(1979~)

누구나 비밀 하나쯤 간직한 채 살아간다.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주려 끝내 입을 닫았는데, 알고 보니 다들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나와만 친한 게 아니라, 그가 여럿에게 “너만 알고 있어” 하고 비밀을 털어놓았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너무 티 나게 행동해 슬쩍 떠보는 말에 술술 풀어놓았을 수도 있다. 나만 입 닫는다고 비밀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나만 모르고 있다가 곤란한 일을 겪기도 한다. 또 어떤 비밀은 평생 가슴에 품고 산다.

“가게에서 초콜릿을 훔치다가” 내게 들킨 이웃집 언니와 비밀을 공유한다. 나로선 비밀이지만 언니로선 내게 약점을 잡힌 셈이다. 내가 입을 열면 언니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쉬’가 아니라 ‘쉬쉬’인 것은 나와 이웃집 언니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서로 조용히 하라는 몸짓이다. 그 순간 비밀이 생겨난다. 약점을 잡힌 언니는 밤이 무서운 날마다 내 방에 와서 같이 잔다. 그런 상황이 불편한 언니는 은근슬쩍 내 심기를 건드린다. 결국 관계가 틀어지고 만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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