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버스정류장 줄 안 서는 영국인들, ‘이것’ 보이자 홍해처럼 갈라졌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전세계 10억명 넘는 장애인 위해

BBC·바비인형도 팔 걷어붙였다

런던의 버스 정류장에선 줄을 잘 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서 있으면 버스가 도착했을 때 어떻게 ‘차례차례 빨리빨리’ 탈 수 있는 건지? 한국에서 일렬로 길게 줄을 서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저는 처음에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다들 서로 본체만체 적당한 거리 유지하며 띄엄띄엄 딴청을 피우면서 기다리다가, 버스가 도착하면 슬금슬금 버스 출입문으로 모여듭니다.

서로 몸이 닿거나 밀치면 실례라기에 멀찍이 서서 쭈뼛대고 있으면 어느새 저만치 맨 뒤로 밀려나기 일쑤. ‘신사의 나라도 버스 자리 앞에선 별수 없구나’ 싶었는데, 그 생각은 아이를 낳고 유모차를 끌고 다니면서부터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유모차를 끌고 있거나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그야말로 홍해가 갈라지듯이 저를 중심으로 길이 트여 여유롭게 탑승하는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휠체어를 탄 승객이 있다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버스가 도착함과 동시에 알림음이 울리면서 뒷문이 열리고 휠체어를 탄 승객이 올라타는 것이 순서로, 휠체어 승객이 버스에 탑승해 자리를 완전히 잡고 나서야 앞쪽 출입문이 열리면서 일반 승객들이 탑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줄을 서지 않는 이유는 자리에 앉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더군요. ‘불편한’ ‘움직이기가 어려운’ 순서로, 장애인, 어린이나 노약자, 임신부 등이 먼저 타고 먼저 내립니다. 누구도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지키는 확실한 차례가 있었던 겁니다.

조선일보

영국 런던의 버스 정류장에서 시민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 이들은 줄을 서지 않고 있어도 몸이 불편하거나 움직이기가 어려운 이들이 먼저 타고 내릴 수 있도록 하는 암묵적인 규칙을 지킨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현재 런던의 700개 버스노선에서 운행되는 버스는 모두가 저층, 휠체어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등록된 안내견은 동승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고요. 지하철역의 전부는 아니지만 60개 이상의 역에서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계단 없는 출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수동 탑승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플랫폼 가장자리에 촉각 표지,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청각 정보가 제공되고 있지요.

영국 교통부는 또한 올해 장애인 자선 단체 스코프(Scope)와 협력해, 장애인의 일상생활에 대한 물리적인 장벽을 제거하겠다는 장애인 승객헌장을 개발했습니다. 스코프의 최고 경영자인 마크 호킨슨(Mark Hodgkinson)은 이 헌장을 통해 “대중교통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만일 장애인 승객의 여정이 잘못된다면 그것은 서비스 공급자의 책임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이해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부는 이번에 발표한 장애인 승객헌장에서 보조금을 350만 파운드로 증액해 장애인 승객이 택시, 기차, 버스, 페리(보트) 등 모든 형태의 교통수단에 대해 모두가 동등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특히 장애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장벽을 없애는 데 적극적으로 앞서고 있습니다. 얼마 전 다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조지 웹스터가 CBBies(BBC의 아이들을 위한 채널)의 프로그램을 진행한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장애인으로서가 아닌 그저 요리와 춤을 좋아하는 어른으로 소개된 이 진행자의 영상은 조회수가 100만회를 훌쩍 넘기며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지요. BBC는 방송사 750개 팀에 장애인의 기여도를 35%포인트 증가시키며 장애인에 대한 처우와 인식 개선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프로듀서나 성우 등의 방송 업무에 장애인을 참여시켜 그 기여도를 높인다는 취지의 캠페인입니다.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10억명이 넘는 장애인을 포용하는 움직임은 전 세계에서 부지런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비 인형의 제조사인 마텔(Mattel)은 이번 달 귀 뒤에 보청기를 장착한 최초의 바비 인형을 출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제품은 패셔니스타(Fashionistas) 컬렉션의 일부로, 피부 톤, 눈 색깔, 머리 색깔 및 질감, 신체 유형, 장애 및 패션에 따라 다양한 175가지 이상의 외모를 포함한다고 마텔은 말합니다. 바비 인형의 상징적인 라인업은 장애가 있는 더 많은 것을 포함하도록 확장되고 있습니다. 마텔의 바비 인형 및 인형의 수석 부사장 겸 글로벌 책임자인 리사 믹나이트(Lisa McKnight)는 말합니다. “바비는 진심으로 표현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을 반영하기 위해 장애를 포함해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 인형을 계속 소개할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포용의 중요성을 알려주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영국인 다섯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은 장애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 명 중 한 명은 장기적인 관리가 필요한 건강 상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건강 관리의 치료와 기술이 향상될수록 아마도 이 숫자는 더 늘어나겠지요. 영국 정부는 성인 사회 복지 재정 보고서에서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사회의 도움이 필요해지는 인구는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몸이 약하거나 아프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됩니다. 철학자 마크 롤런드는 그의 저서 <철학자와 늑대>에서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썼습니다. 약한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김민지 유튜브 '만두랑'진행자·전 SBS 아나운서]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