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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반지성주의와 개돼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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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임꺽정은 처벌 대상? 포용 대상?

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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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김지진 | 법무법인 리버티 대표변호사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

지난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 중 ‘반지성주의’가 화제가 됐다.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가 창안한 이 개념은 1950~196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미국 사회가 비합리적이고 반지성적이라며 이성을 수단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제시됐다.

윤 대통령이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며 반골검사로 전국적 인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겪었던 불합리한 차별과 비판 등을 고려하면,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를 언급하며 우리 사회가 그 문제점들을 극복해야 한다고 호소한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반지성주의의 본질과 우리 국민의 자정 능력을 고려한다면 대통령 취임사에 들어갈 단어로는 경솔하고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대응을 검사 스타일로 풀어 설명한다면, “임꺽정에게 사형을 구형한다”라는 문장으로 함축할 수 있다. 뜬금없이 웬 임꺽정이냐 하겠지만, 한국 문학을 통틀어 반지성주의를 가장 잘 구현한 작품이 바로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다. 임꺽정은 어떤 특별한 대의나 선행이 없는 “그냥” 도적이기 때문이다. 의적으로서 훔친 재물들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임꺽정은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가 저지른 패악질의 대상이 당대의 기득권층인 양반이나 벼슬아치였기 때문이다. 소설 <임꺽정>을 자세히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임꺽정은 어려서부터 당대 기득권층에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적개심을 드러낸다. 이러한 적개심은 그가 도적으로 활동하면서도 계속돼 그의 먹잇감이 되는 상대방은 으레 양반, 관리, 관군 등 소위 조선 사회의 기득권층 또는 그들의 앞잡이였다.

다시 반지성주의로 돌아가서, 대통령의 말처럼 반지성주의가 우리 사회의 병폐라면 임꺽정은 당연히 엄벌로 다스려야 하는 죄인이다. 형법으로 그를 단죄한다면, 검사는 살인·강도·방화·협박은 물론 부녀자 성희롱과 추행·강간까지 일삼은 임꺽정에게 사형을 구형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게 바로 대통령이 웅변한 반지성주의 배격의 본질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단순히 임꺽정이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불과했다면, 당대에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근 100년 동안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고 여러차례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비록 의적은 아니지만, 부조리한 기득권 세력에 소극적인 저항을 넘어 실질적으로 응징하는 모습에 대중들은 대리만족,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사실 이렇듯 반지성주의를 대표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우리나라 특유의 약자에 대한 관용이 있다.

대통령이 신봉하는 합리주의에는 이러한 대중의 본원적인 감정을 반지성주의로 몰고, 민중을 일종의 교화 대상으로 삼는 면이 있다. 마치 2016년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국민을 개돼지로 빗댄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당시 나 기획관 발언의 핵심도 사회 엘리트들이 하나의 신분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나머지 일반 국민은 이들이 가르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진실인가? 대한민국 국민은 반지성주의에 경도돼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기는커녕, 비록 느리지만 도도한 물결처럼 역사의 전환점에서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해왔다. 4·19 혁명으로 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운동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으며, 국정농단을 일삼으며 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을 탄핵했다. 사실 윤 대통령 본인도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과 내로남불 같은 반지성주의를 국민이 심판하면서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은 이제 반지성주의를 심판하는 검사가 아니라 반지성주의조차 포용해야 하는 대통령이다. 협치와 포용의 상징이 돼야 하는 대통령이 반지성주의를 일종의 적폐로 규정해 취임사에서 사자후를 토한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대한 역사의식 부족의 소치는 아닌지 다시 한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검사 윤석열은 임꺽정에게 사형을 구형해야겠지만, 대통령 윤석열은 임꺽정에 대한 사면을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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