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신임 한국은행 총재가 중앙은행의 변화를 향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21일 취임사에서다. 그동안 한은 총재들은 한은의 독립성을 이유로 경제 정책에 대한 발언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이 총재는 거시 경제에 대한 진단과 대책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 경제가 결정적 순간에 선 만큼, 중앙은행의 책임도 커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취임했다. 이 총재는 이날 취임식에서 "한국 경제는 대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했다. 사진기자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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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 경제가) 코로나 위기 이후 뉴노멀(새로운 기준) 전환 과정의 도전을 이겨내고 한 단계 더 도약할지, 아니면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 추세가 이어지면서 장기 저성장(secular stagnation) 국면으로 빠져들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에 놓여있다”며 "경제 정책의 프레임(틀)을 과감히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이 총재는 “한은의 본연의 역할은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인데 왜 이렇게 큰 거시적 담론을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적 도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의 책임이 통화정책의 테두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고 설명했다.
뛰는 물가, 약해지는 성장동력.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
그러면서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지게 된다면 정상궤도로의 회복을 위한 정책수단, 특히 통화정책의 경우 더욱이 그 효과가 제약될 수밖에 없다”며 “그러한 상황으로까지 가기 전에 통화정책만으로는 안 되며, 재정정책과 구조개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경제 정책의 틀을 바꾸고 민간 주도의 창의적이고 질적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구조 개혁을 통한 자원 재배분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과거 잘 달리던 경주마가 지쳐 예전 같지 않은데도 과거의 성공에 사로잡혀 새 말로 갈아타기를 주저하는 누를 범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재정과 구조개혁과 발맞춘 통화정책이란 '이창용 호(號)'의 색깔을 제대로 드러냈지만, 당장 그의 앞에 놓인 당면 과제는 치솟고 있는 물가 잡기다.
소비자물가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통계청] |
3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4.1% 올랐다. 수입물가와 생산자물가 등 소비자물가 선행지표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공급망 병목현장과 원자재 가격 인상 등 해외발 물가 상승 압력도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날 임명장 수여식에서 “지금 제일 중요하고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문제는 물가 안정”이라고 말했다.
이 총재도 “인플레이션 압력이 한층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경기 회복세가 기존 전망보다는 약화할 것”이라며 “성장과 물가 간 상충관계가 통화정책 운용을 더욱 제약하고 있기에 정교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정책을 운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지난 19일 인사청문회에서 “지금은 인기가 없더라도 선제적으로 금리 인상 신호를 주는 게 맞다”며 기준금리 인상을 시사했다.
가계신용 잔액 추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
이 총재가 풀어야 할 숙제는 물가만이 아니다. 그가 한국 경제의 과제로 꼽은 부채와 양극화도 쉽지 않은 문제다. 지난해 말 가계가 진 빚은 1862조원 1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7.8%(134조1000억원)가 늘었고, 국가채무는 967조2000억원으로 1년 사이 14%(120조6000억원)가 늘었다.
이 총재는 “고령화로 복지 수요가 늘어날수록 경제성장에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은 줄어들 것”이라며 “부채의 지속적인 확대가 자칫 거품 붕괴로 이어질 경우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고 말했다.
양극화에 대해서는 “지식 집약 산업으로의 전환 과정에서 소득 불평등이 확대되고, 인구 고령화로 인해 청년 실업과 노인빈곤, 지역 간 불균형 문제도 커지고 있다”며 “지나친 양극화는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켜 우리의 성장잠재력을 훼손시킬 것이기에 이에 대한 해결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
이 총재는 정부와 민간과의 소통도 늘리겠다고 했다. 이 총재는 “정부를 비롯한 관련 기관의 전문가와도 더 많이 소통해야 한다”며 “정부와의 소통에 대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소통한다고 독립성이 저해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통화신용정책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우리 경제를 가장 잘 아는,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서 한은의 면모가 더욱 굳건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를 위한 전문성 강화와 이에 걸맞은 처우 개선 등도 언급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 교수는 “물가 상승과 경기 둔화가 함께 오고 있는 비상 상황인 만큼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은과 재정·금융정책을 담당하는 정부 부처 간의 긴밀한 공조가 필수적”이라며 “한은이 가진 데이터와 분석 능력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정부와 소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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