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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옛 소련에 "북ㆍ중 좀 설득해라"…UN 남북 동시가입 외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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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북한에 대해 한국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와 궁극적 통일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명하여주기 바란다."

1991년 4월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과 예고르 로가초프 당시 소련 외무차관의 면담록에는 같은 해 9월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을 위해 한국이 전방위 여론전을 펼친 정황이 나타난다. 외교부는 이같은 내용 등을 담은 외교 문서 약 40만쪽 분량을 15일 일반에 공개했다.

중앙일보

1991 년 4월 4일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과 예고르 로가초프 당시 소련 외무차관 면담록. 외교부. 밑줄은 기자가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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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통해 북ㆍ중 설득



외교부가 이날 공개한 40만 5000쪽의 외교 문서는 지난 1991년 생산됐다. 그 해 가장 중요한 외교 이슈 중 하나가 남북 유엔 동시 가입문제다. 이날 공개된 문서 중 상당수가 이를 위한 정부의 교섭 노력이 담겨 있다.

당시 북한은 남북 유엔 동시 가입이 분단을 고착화 시키는 것이라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사회주의 형제국가라고 여겼던 동유럽 국가들의 체제전환 등의 정세 변화가 자신들의 국제사회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로 유엔 동시 가입으로 돌아섰다.

우선, 정부는 소련에 북한과 중국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고 관련 동향을 파악했다. 동구권과도 외교관계를 맺는 '7·7선언'의 이행과 함께 '외곽 때리기' 였다. 소련은 앞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 권한으로 한국의 유엔 가입을 막아섰지만 1990년 한국과 수교 이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같은 해 4월 방한한 로가초프 차관에게 "소련이 북한에 대해 한국과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와 궁극적 통일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명해주기 바란다"며 "소련이 북한에 대해 외교정책 일반은 물론, 특히 유엔 문제에 대해서도 현실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설득해 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

이에 로가초프 차관은 "북한을 설득하는 일은 소련으로서도 매우 하기 어려운 과제"라며 "한국 측의 희망은 꼭 본국에 보고하겠지만, 한반도 문제 해결은 타협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타협을 위해서는 양측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북 유엔 동시 가입에 대한 중국의 당초 강경했던 입장도 이날 공개된 문서에 드러났다.

지난 91년 주미 한국대사관이 작성한 전문에는 "중국은 한국이 90년 중 유엔 가입을 시도하지 않은 데 대해 만족한다"고 돼있다. 로가초프 차관의 방중 결과에 나타난 대목인데, 이후 그는 중국을 방문해 "한국은 91년 중 유엔 가입을 희망하는 바 소련으로서는 중국이 이에 반대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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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한국대사관이 1991 년 1월 15일 미 국무부 본부에 보낸 전문에 담긴 예고르 로가초프 소련 외무차관 관의 방중 결과. 외교부 제공. 밑줄은 기자가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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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비아ㆍ예멘서 여론전



남북이 동시 가입이 아닌 단일 의석으로 가입해야 한다고 맞서던 북한의 전방위적인 시도도 눈에 띈다. 주리비아 한국대사관 보고에 따르면 "김영남 당시 북한 부총리 겸 외교부장은 91년 3월 리비아를 방문해 한국의 단독 가입을 반대하는 북한의 입장을 유엔, 비동맹회의에서 지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외에도 예멘에서 북한 대사가 예멘 외무성 관계자를 관저 만찬에 초대해 남북의 유엔 단일 의석 가입 필요성을 설명한 동향이 보고됐고, 노르웨이 측은 당시 한국 측에 "북한 대사가 노르웨이 외무부를 찾아와 유엔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고 귀뜸하기도 했다.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지난 2019년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 등 대북 협상 과정에서 강경론을 펼쳤던 존 볼턴도 관련 논의에 등장해 주목된다. 당시 그는 국제기구 담당 차관보였는데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유엔 회원국이 된다면 북한을 '평화 파괴자'로 규정한 50년 안보리 결의를 취소해야 하는지 궁금해했다.

이에 유종하 당시 외무부 차관은 "북한의 (유엔)가입 신청을 승인하는 행위가 북한을 평화 애호국으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므로 1950년 유엔 결의내용을 변경시키는 조치가 별도로 필요할지 의문"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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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17일 당시 이상옥 외교부 장관이 한국의 유엔 가입 직후 유엔 총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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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보다 분량 많아"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 외에도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엔, 미주, 일본 등 순방, 90년대 초 한국 인권 상황,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 관련 문서, 67년 발효된 한ㆍ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관련 내용 등이 포함됐다.

외교부는 94년부터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이 지난 외교 문서는 당국자, 전직 대사, 외부 전문위원의 검토를 거쳐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29차례에 걸쳐 3만2500여 권(463만 여쪽)의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이번에는 지난해 기준으로 30년 전 문서인 91년 생산된 문서가 검토를 거쳐 공개됐다.

외교부 당국자는 "예년에 비해 공개 대상이 된 외교 문서의 양이 많고 민감한 이슈도 많아 검토 절차가 더 소요됐다"며 "보통 한 차례 열던 외교문서 공개 심의회를 이번엔 네 차례 개최했다"고 말했다.

외교문서 원문은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 외교사료관 외교문서열람실에서 확인할 수 있고,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 해제집 책자는 외교사료관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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