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자신의 임기를 스스로 3주 단축하기로 결단했다. 그는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 마치 무슨 책임을 지는 것처럼 비칠 수 있어 고민했다"며 "임기를 채우면 새 정부가 출범하기 딱 열흘 전이 된다. 이게 마무리도 못하고, 새 정부 출발에 혼선이 될 수 있어 내가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했다. 그게 모두에게 편할 것 같아서"라고 말했다. 오는 8일 퇴임을 앞둔 김 원내대표를 만나 대선과 향후 정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대선 결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민주주의가 획기적인 진일보를 한 대사건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보통 포퓰리즘, 막 퍼주는 나라들은 거기에 익숙해져서 정권을 바꾸지 못한다.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그리스도 그렇고, 포퓰리즘이 유행했던 나라치고 제대로 민주주의를 정상으로 회복한 나라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문재인 정권 들어 (나라) 빚을 400조원이나 늘려가면서 어마어마하게 선심 정책을 썼는데도, 10년도 아니고 5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다. 국민을 속이는 선심 정책으로 표만 얻어가겠다는 생각이 통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계기가 앞으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는 영양분이 될 것이다.
―여야 표차가 얼마 나지 않았다.
▷아무리 적게 이겨도 3~5%포인트라고 기대했다. 많은 집계도 그렇게 예측했는데 뜻밖이었다. 결국 막판에 조직력, 현 여권이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를 다 장악하고 있는 네트워크가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모이게 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고 본다.
―그래서 부정선거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런 건 없다고 본다. 투표 감시 체계를 훨씬 촘촘히 만들고, 폐쇄회로(CC)TV로 24시간 감독하며, 관외 투표 배달 과정에서도 직접 참관하게 했다. 그 외에 시민사회단체와 우리 당 지지자를 중심으로 사전투표 보관함이 있는 건물을 감시하는 등 철저하게 했다. 우리가 받은 보고에서도 중간중간 부실한 관리가 있었던 건 맞지만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대법원이 부정선거 관련 재판을 2년이 넘도록 미뤄놓은 게 있는데, 그걸 처리해서 국민 불신을 자초하지 않아야 한다.
―윤석열 대선후보와 이준석 당대표 간 화해 드라마를 만든 주인공인데.
▷후보와 대표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보다 대장동 게이트가 대선 승리의 가장 큰 동력이었다고 본다. 작년 추석 직전이었는데, 작은 지역신문에서 보도가 나간 뒤 그냥 지나칠 뻔한 것을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다' 싶어서 내가 직접 주재하는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대응했다. 내가 광역단체장을 해봐서 이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 후로 '화천대유 하세요'를 유행시켜 국민에게 중요한 정보와 인식을 심어줬다.
―이제 선거가 끝났으니 대장동 이슈도 끝인가.
▷아니다. 그럴 문제가 아니다. 이건 공정과 정의에 관한 문제다. 어떻게 몇 억원 투자한 사람이 7000억~8000억원, 1조원 되는 돈을 가져갈 수 있나.이건 상식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한다. 검찰 수사든, 특검이든 어떤 방식이든 필요하다. 돈 많고 권력 있다고 봐주는 건 안 된다.
―지지자 중에 적폐수사를 또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다.
▷역대 정권 중 문재인 정권처럼 정치 보복하는 사례는 처음이다. 나는 '적폐 청산이라 쓰고 정적 숙청이라 읽는다'고 말하고 다닌다. 처음부터 정치 보복을 시작했고, 대통령이 직접 가이드라인을 주면서 재수사를 지휘했던 정권이다. 게다가 내가 울산 사건의 당사자다. 정치 보복이냐, 적폐 수사냐 이런 걸 떠나서 진실은 밝혀야 한다. '선거 끝났으니 다 덮고 가자' 이런 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히고 나서 그다음에 이것을 어떻게 털고 갈 것인가를 생각해야지, 진실마저 숨기고 가는 것은 올바른 청산 방법이 아니다. 처벌이나 보복이 목적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역사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4선 의원, 광역단체장, 원내대표까지 했는데 다음 포지션은.
▷사실 할 게 얼마 안 남았다. 주변에서 '갈 데까지 갔다'고 하더라. 남은 게 당대표, 국무총리, 국회의장 정도다. 그중 뭘 할지는 국민 선택에 달린 거지. 솔직히 정치인이 목표나 꿈이 없다고 하면 에너지가 안 나온다고 생각한다. 꿈이 에너지의 원천이다. 내가 도지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다면 도지사가 될 때까지 열심히 하겠지만, 그 꿈을 이루고 난 뒤 그냥 편안하게 지내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건 개인적으로도 성취 동기이자, 자기가 맡은 영역에서 국민에게 좀 더 많은 베네핏을 주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이 되니까, 그 꿈을 위해 계속 갈 것이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쉽지 않을 텐데.
▷노무현 대통령 때 우리가 과반 다수당이었다. 탄핵을 추진할 만큼 절대다수당이었다. 그런 완력으로 일을 처리한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 결과적으로 그게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이 됐다. 그 후로 굉장히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그런 걸 보면 중요한 건 결국 민심이지, 의석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걸 반면교사로 삼고 있는데, 더불어민주당은 아직.
―민주당이 어떻길래.
▷민주당이 잘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완력으로 비틀어서 하겠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법을 통과시키겠다, 민주당 2중대 육성법을 만들려고 기초의원을 다당제로 하겠다, 이렇게 나오는데, 이런 형태로 당리당략에 따라 의석을 완력으로, 폭력적으로 행사하면 폭망하게 된다. 그걸 민주당도 인식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정말 민주당에도 잃어버린 세월이 올지 모른다.
―국민의힘은 그걸 잘 알고 있는 건가.
▷우리도 더 겸손해야 하고, 민심을 얻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소수당이라는 전제하에 더 낮은 자세로 협치하고, 통합을 위한 호소도 하고, 정말 부당한 반대에 직면할 때는 국민께 설명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도 구하면서 낮은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직 대통령 사면에 대한 생각은.
▷현 정권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풀고 가야 한다. 더 이상 대통령의 흑역사를 반복해선 안 된다고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에게 수차례 얘기했는데, 끝까지 안 듣더니 선거를 앞둔 묘한 시점에 박근혜 전 대통령만 사면하더라. 그리고 또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끝까지 하지 않는다. 이제는 스스로 풀고 가야 한다. 본인은 고리를 걸어놓고, 나한테는 걸지 말라고 하면 국민에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정치 바로서야, 나라 바로선다"…부친의 뜻 이어받아 정계 입문
반독재투쟁 펼친 아버지 보며
정치인으로 가야할 길 찾아
김기현 원내대표의 부친은 5개월짜리 정치인이었다. 그의 부친은 제2공화국 시절인 1960년 12월, 민주당(YS계열, 선거 후 신민당으로 분리) 소속으로 직선제 경남도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30대 후반 청년 정치인의 꿈도 잠깐, 이듬해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당시 군부권력은 전국 도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지방자치를 중단시켰다. 정치인들에게는 정화법(정치활동정화법)이라는 이름으로 금족령을 내렸다. 김 원내대표의 부친이 희생타였다.
순식간에 정치적 입지를 상실한 김 원내대표의 부친은 반독재투쟁을 시작했다. 보안관찰 대상이어서 경찰관의 관심을 받았고 동네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동네에서 "군사독재 물러가라"를 외치며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김 원내대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부친은 어린 김 원내대표에게 늘 "정치가 잘못되면 나라가 잘못된다. 정치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게 김 원내대표의 꿈으로 자리 잡았다.
김 원내대표는 부산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마음에 담고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법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물려받을 재산이 없으니 정치를 하려면 스스로 벌어서 자수성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변호사라는 직업은 자수성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하기에 좋은 직업이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로 잠깐 일하다가 일찌감치 변호사로 전향했다. 그리고 10년 변호사 생활을 한 후 정치에 뛰어들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울산광역시 남구을에 도전장을 냈다. 공천 경쟁자는 울산의 3선 시의원으로 시의회 부의장까지 지낸 토박이였다. 막강한 상대를 만나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결국 당에서는 경선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 역사에서 첫 경선이었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치러진 경선에서 최종 공천장을 거머쥐었고, 그해 5월 제17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김 원내대표는 "부친은 직장 없이 고생하시다가 건강까지 잃어서 힘드셨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가 초선 국회의원이 되는 모습은 지켜보셨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의 정치 역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21대 국회에 다시 돌아올 때도 현역 의원을 상대로 경선을 치렀고, 울산광역시장 선거도 쉽지 않았다. 김 원내대표는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들을 누가 점지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개척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 김 원내대표는…
△1959년 울산 출생 △부산동고등학교 △서울대 법학과 △사법고시 25회 △부산지법 울산지원 판사 △김기현 법률사무소 변호사 △제17·18·19·21대 국회의원 △울산광역시장 △국민의힘 원내대표
[정리 = 정주원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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