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국들이 24일(현지시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동시에 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 강화와 대러시아 제재 효과를 높이는 방안 등을 논의했다. 우크라이나에 대량 살상무기(WMD) 방어 장비를 지원하고 동유럽국 주둔 나토 병력을 늘리는 한편, 러시아산 의존도가 높은 천연가스를 EU가 공동구매한 뒤 분배하는 방안 등도 검토했다.
나토 회원국들은 이날 열린 긴급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의 생화학 무기 등 WMD 사용 가능성에 대한 대비 태세 강화를 집중 논의할 것이라고 CNN방송 등이 보도했다. 앞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전날 “화학, 생물학, 방사능, 핵 위협으로 보호할 장비 제공 방안에 대해 합의할 예정“이라며 “사이버 안보 지원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합의에 이를 경우 나토 차원에서 우크라이나에 직접 대량살상무기 대응 장비를 지원하는 첫 사례가 된다.
이 같은 논의는 최근 군사작전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가 WMD로 도발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브뤼셀로 떠나기 전 취재진에게 러시아의 화학전 위협에 대해 “실제 위협”이라고 강조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가 WMD를 사용할 수 있는 우발적인 상황에 대해 협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토 정상회의에 화상으로 참석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연설에서 러시아가 무차별 살상무기인 백린탄을 사용하고 있다며 “러시아군은 오늘 아침에도 백린탄을 사용해 어른과 아이를 또다시 살해했다”고 밝혔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2018년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 이후 서방 국가들이 대응했을 때와 유사한 수준으로 우크라이나에 보호 장비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토는 다국적 전투집단을 불가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 동유럽 4개국에 신규 배치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러시아의 잠재적 침공을 막기 위해 폴란드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발트 3국)에 군을 배치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이날 회의 모두발언에서 “나토의 핵심 임무는 모든 동맹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며 우리는 나토 동쪽 지역에서 군사력을 증강해왔다”며 “향후 나토 차원의 억지력을 장기적으로 리셋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동유럽국에는 나토군 4만명이 주둔하고 있는데 대규모 병력 증가가 이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이번 조치로 우리는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동쪽 경계를 따라 8개의 다국적 나토 전투집단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파견될 병력이 “필요한 만큼 오래” 머물 것이라며 “이 모든 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이어 폴란드와 발트 3국 등 나토 동유럽 동맹국을 공격할 것이라면서 “나토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토는 1997년 러시아와 맺은 ‘나토-러시아 관계 정립 조례’에 따라 이후 나토에 신규 가입한 발트 3국 등에 병력을 상설 주둔시킬 수 없고, 정해진 기간만큼 순환 배치만 할 수 있다. 하지만 나토 등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조례 성립 전제조건인 ‘예측가능한’ 안보 환경이 깨졌다고 주장한다.
EU 회원국들은 러시아산 의존도가 높은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회원국 공동구매 방안을 논의한다. 앞서 전날 EU 행정부인 집행위원회는 별도로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각국 수요를 파악하고 공동구매한 뒤 공정하게 분배하자고 제안했다. EU는 러시아 제재 수단의 일환으로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줄여 2027년까지 중단하기로 했는데, 이에 따라 천연가스 가격이 오를 경우를 대비하자는 취지다. EU 집행위원회 TF는 당장 다음 겨울에 대비해 공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수요 예측에 나설 전망이다. 이와 별도로 각 회원국들이 2023년부터 매년 11월1일까지는 가스 저장량을 권고량의 90% 이상까지 채우도록 하는 법안도 발의했다.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전쟁이 쉽고 빠르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기존 제재 회피를 막기 위한 강력한 새 금융 제재도 논의 대상에 포함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나토와 EU 정상회의 그리고 서방이 주축이 된 주요 7개국 정상회의(G7) 개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한 달째 접어든 시점에서 서방의 단합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으로 해석된다. 다만 유럽 국가들 사이에도 입장차가 적지 않아 어느 정도 구속력 있는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U가 천연가스 공동구매 과정에서 도매가격 상한선을 설정하고 공급자에게 시장 가격 차액분만큼 보전해주는 방안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벨기에와 스페인은 상한선을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다른 회원국들은 도매가격 상한선을 설정하면 제한이 없는 다른 국가들로 쏠림 현상이 발생할 수 있고 재생에너지 부문 투자도 위축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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