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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탈레반, 아프간 장악

아프간 동결 자산을 9·11 배상금으로 지급… 과연 정당한가? [세계의 분쟁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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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아프가니스탄 중서부 헤라트주에 있는 한 난민캠프에서 지난달 20일 어린이들이 벽돌로 지어진 임시 가옥 앞에 앉아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재점령한 아프간은 최악의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의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IGAR)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아프간의 1인당 국민소득이 탈레반 집권 전인 2020년 500달러(약 60만 원)였으나 올해는 350달러까지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AF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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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1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에 동결돼 있는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 자산 70억 달러(약 8조4,300억 원) 중 절반인 35억 달러를 9ㆍ11 테러 희생자 유족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나머지 절반은 아프간 주민을 위한 인도주의 기금으로 배정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아프간 시민들과 전 세계 아프간 디아스포라(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는 즉각 거세게 반발했다. 미국 내에서도 이번 결정이 합당한지를 두고 적잖은 논란이 일었다.

트위터의 실시간 음성 대화 서비스 ‘스페이스’에서는 토론도 진행됐다. 아프간 전 정부에서 일한 관료들, 학자들, 법조인, 언론인, 활동가 등이 두루 참여했다. 와히드 마즈로 전 보건장관도 그중 한 명이다. 와히드 전 장관은 아프간 수도 카불이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에 함락당한 뒤에도 아프간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장관 임무를 수행하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 헌신해 아프간 사회에서 두루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가난한 나라의 자산을 빼앗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또 “아프간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행위(9ㆍ11 테러)로 부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며 “(이번 조치는) 수년째 지속되고 있는 ‘더러운 게임’의 또 다른 챕터”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유엔에 따르면 아프간 인구 4,000만 명의 평균연령은 18.4세에 불과하다. 아프간인 누구도 9ㆍ11 테러에 가담하지 않았을뿐더러 현재 아프간 인구 절반은 9ㆍ11 테러 이후 태어났다. 테러와 아무 상관없는 이들이 단지 아프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집단 처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탈레반 1기 정권이 무너진 뒤 들어선 첫 아프간 정부의 수반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 전 대통령도 비판에 가세했다. 카르자이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카불에서 기자회견까지 열고 “미국의 결정은 정의롭지 못한 불공정 행위이자 아프간인에 대한 잔혹 행위”라고 지적했다.

“미국 내 아프간 자금은 아프간 어느 정부에도 속한 돈이 아니다. 내가 대통령일 때(2001.12~2014.9)의 돈도 아니며 (그 뒤를 이은) 아슈라프 가니 정부(2014.9~2021.8)의 돈도 아니다. 현 정부(탈레반)의 돈도 물론 아니다. 그 돈은 아프간 국민들의 것이다. 아프간 국민들이 정당한 소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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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서 시민들이 미국 내 아프간 자산 절반을 9ㆍ11 테러 희생자 유족 배상에 사용하기로 결정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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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아프간이 경제 붕괴로 극심한 인도주의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조치라 더 큰 비난을 샀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과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아프간 ‘통합 식량안보 단계분류(IPC)’ 공동 발표를 통해 아프간 전체 인구 55%에 해당하는 2,280만 명이 겨울 한파가 이어지는 이달 말까지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IPC는 심각성 정도에 따라 ‘안정-경고-위기-비상-기근’ 등 5단계로 분류되는데, 3단계 이상을 ‘급성 식량 위기’ 상태로 본다. 아프간에선 3단계 ‘위기’에 처한 인구가 1,400만 명, 4단계 ‘비상’이 874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또 당장 구호 식량을 지원하지 않으면 올해 말 100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급성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결과적으로 이번 행정명령은 아프간 아사 위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례적인 조치는 아니다. 지난해 8월 15일 탈레반이 카불에 입성한 직후 미국은 아프간 해외 자산을 동결하는 경제 제재를 부과했다. 이번 행정명령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지난해 10월 월리 아데예모 미국 재무부 부장관은 상원 청문회에서 “탈레반이 아프간 중앙은행 외환 보유자산에 접근치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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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 인근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100여 명이 사망한 지난해 8월 26일 한 시민이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 앞에 도착해 울부짖고 있다(왼쪽). 같은 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열린 테러 관련 기자회견 중 잠시 발언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AFP·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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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맥락에서 이번 행정명령의 배경과 의미를 다시 세밀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아프간 동결 자산 절반을 9ㆍ11 유가족 배상금으로 책정한 건 20년 전 시작된 소송과 관련돼 있다. 9ㆍ11 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남쪽 타워 101층에서 일하던 남편을 잃은 피오나 해블리시는 다른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 테러 주범 오사마 빈라덴과 그를 숨겨준 탈레반,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무장세력 헤즈볼라 등을 상대로 집단 소송을 냈다. 이른바 ‘해블리시 소송’이다. 2012년 10월 뉴욕남부지방법원은 유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피고는 원고들에게 배상금 60억4,851만3,805달러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판결은 상징적 성격이 강했고, 테러 집단을 상대로 배상금을 받아낼 길은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탈레반이 아프간을 다시 장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프간 정부로 기능하고 있는 탈레반은 뉴욕연방준비은행에 예치된 아프간 중앙은행 자산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했고, 탈레반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미국은 당연히 거부했다. 여기에 ‘해블리시 소송’에 참여한 유가족과 다른 유가족들도 이 돈을 9ㆍ11 희생자를 위한 배상금으로 압류해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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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20주년이었던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시 옛 세계무역센터 빌딩 자리에 조성된 '메모리얼 풀' 위로 비가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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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정명령을 두고 법조계 일부에선 9ㆍ11 유가족 원고단이 70억 달러 전부를 압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정부가 개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산 절반에 해당하는 35억 달러를 아프간 인도주의 기금으로 배정한 것도 일종의 절충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단체를 비롯한 활동가 그룹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자국 내 아프간 자산을 아프간 중앙은행으로 돌려보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법상 엄연한 주권 국가의 외환 자산을 9ㆍ11 유가족 배상금으로 전환한 건 옳지 않다는 지적이다. 하룬 라히미 전 아프간 아메리칸대 교수가 이 같은 논리를 펴는 대표적 인사다. 스페이스 토론에 여러 차례 패널로 참여한 그는 “이 돈이 외국 중앙은행의 자산으로서 보호받아야 하고 국제법의 보호도 받는다”고 말했다. 아랍계 위성방송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도 “이번 조치는 국제법상 합법적이지 않다”며 “아프간인들이 그 돈의 진짜 주인”이라고 강변했다.

아프간인들이 분노하는 건 9ㆍ11 배상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나머지 35억 달러를 인도주의 기금으로 배정한 조치도 공분을 사고 있다. 동결 자산이 엄연히 아프간 소유임에도 마치 미국이 아프간에 구호자금을 적선하는 듯한 선민의식을 보였다는 비판이다. 아프간계 미국인으로 아프간 중앙은행 이사를 지냈던 샤 메흐라 미국 몽고메리칼리지 경제학과 교수는 “이 돈이 구호기금으로 쓰일 게 아니라 아프간 중앙은행으로 바로 보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돈이 부정하게 유용되지 않도록 엄격하게 감시하면서 매달 1억5,000만 달러씩 순차적으로 동결 해제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지난 20년간 해외 원조에 의존해 온 아프간 경제는 원조가 중단되자마자 붕괴 직전에 이를 만큼 취약하다. 지난해 말 유엔은 올해 아프간 국내총생산(GDP)이 30% 가까이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원조 경제 실패가 트라우마로 깊이 새겨지는 지금, 아프간에선 경제 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나지르 카비리 아프간 재무부 차관은 지난달 19일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상황이 한편으로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프간이 해외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에서 자기충족적 경제로 변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얘기다. 카비리 차관은 탈레반을 피해 카불을 버리고 도망친 가니 전 대통령 시절에도 재무부 차관을 맡았던 인물이다. 전문 인력이 태부족인 현실에 탈레반은 아프간을 떠나지 않았던 그를 유임시켰다. 카비리 차관은 “원조 의존 경제는 결코 절대로 허용해선 안 된다”며 “그런 경제 구조가 지금의 경제 붕괴를 초래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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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인근 빈민가에서 한 소년이 진흙 벽돌집 옥상에 올라가 연을 날리고 있다. 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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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성향 아프간 디아스포라 그룹 연합체인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아프간인들의 모임(Afghans for a Better Future)’도 9ㆍ11 유가족들에게 호소하고 나섰다. 이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한 당일 발표한 성명에서 “아프간 자산을 배상금으로 동결한다고 해서 정의가 실현되는 건 아니며 더욱 안타까운 비극과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부) 아프간계 미국인들과 단합해 또 다른 소송을 제기하려는 유가족들은 소송을 재검토하고 취소해 달라”고 촉구했다.

9ㆍ11 유가족 모두가 아프간 동결 자산을 희생자 배상금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또 다른 유가족들이 창립한 평화단체 ‘평화로운 내일(Peaceful Tomorrow)’은 입장이 확연히 다르다. 평화로운 내일은 9ㆍ11 희생자 유가족 4명이 2002년 1월 미국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 아프간을 방문한 직후 출범시킨 단체다. 이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강하게 비판했다. “우리는 9월 11일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으로서 바이든 대통령에게 요청한다”로 시작하는 성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아프간 중앙은행 자산을 아프간인들에게 돌려줘라. 그건 그들의 돈이지 우리의 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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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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