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열린 ‘2022년도 국가안전보장회의 및 대외경제안보전략회의 연석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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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방정책 등을 이유로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기 어렵다고 밝혔던 문재인 정부가 반나절 만에 “러시아가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 우리도 제재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고 입장을 바꿨다. 다만 명확히 ‘제재를 하겠다’기보다는,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외교부는 24일 오전 11시 22분 출입기자단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어떠한 형태로든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 우리 정부로서도 대러 수출통제 등 제재에 동참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밝힌다”고 입장을 알렸다. 예고에 없던 공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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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방정책’ 이유로 대더니…
외교부는 “제반 상황에 비춰볼 때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미국 등 우방국들과 대응 방안을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고도 설명했다.
23일(현지시간) 러시아 장갑차들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경 인근의 철도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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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반나절 전인 22일(현지시간) 외교부 당국자는 프랑스 파리 주재 특파원들과 만나 한국 정부가 대러 독자 제재를 가할 가능성을 묻자 러시아가 신북방정책의 핵심 국가인 만큼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제재에 동참하더라도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면서다. 사실상 제재에 동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같은 입장 선회는 결국 미국의 강한 요구 때문으로 보인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22일(현지시간) 제재와 관련해 “우리는 유럽연합(EU), 영국, 캐나다, 일본, 호주 등 동맹국 및 파트너와 함께 논의해 하루도 안 돼 첫 번째 제재를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외신들은 싱가포르와 대만도 제재에 동참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한국만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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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 쏙 빠진 美 '대러 스크럼'
동맹 및 우방과의 연합 전선 형성이 미국이 구상하는 ‘대러 스크럼’의 핵심인데, 안보 동맹인 한국의 부재는 균열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미국이 한국 정부에 대러 제재 동참 관련 협의를 요청한 건 최근 며칠 사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제재 구상 초기부터 협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새벽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11분 연설 영상을 올렸다. 젤렌스키 페이스북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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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부는 소극적 입장으로 일관했다. 지난 22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의 긴장 고조 상황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외교부 대변인 성명)고만 밝혔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우려했을 뿐 유엔헌장 위반으로 볼 수 있는 러시아의 군사적 조치에 대해서는 규탄하거나 유감조차 표명하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제재 동참에 대한 잇따른 질문에도 “협의 중”이라는 답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이튿날 미국이 이를 러시아의 ‘침공’으로 규정한 뒤 다시 입장을 문의했지만, 외교부는 “기존 입장과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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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극적 정부, 北 문제 불똥에 신경
청와대는 23일 미국이 제재 수위를 높일 경우 한국 기업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외교경로를 통해 밝히고, 미국의 양해를 구할 수 있다는 입장까지 보였다. 제재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보고 있다”는 유보적 입장을 유지한 채다.
이에 더해 새로운 정부가 탄생할 대선을 채 보름도 남겨놓지 않고 문 정부는 신북방정책을 제재 불참의 명분으로 들었다. 결국 ‘안보 레임덕’의 궁색한 변명일 뿐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국제사회의 우크라이나 사태 대응 논의에서 한국 외교는 아무런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가안보회의(NSC)를 주재하며 “우크라이나 정세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노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적극 노력하라”고 지시하는 등 오히려 북한 문제에 튈 불똥을 더 걱정하는 분위기마저 감지됐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
하지만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이 23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오늘 밤”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할 수 있다고 밝히는 등 상황이 긴박해졌다. 이에 한국 역시 더 이상 미국의 제재 동참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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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 못해 동참 티내기, 실익 뭔가"
그러면서도 외교부 입장 곳곳에서는 신중함이 묻어났다. “어떤 형태로든” “동참할 수밖에 없다” 등의 표현에서다. “전면전을 감행할 경우”라는 조건도 달았다. 외교부의 입장은 정확하게는 ‘제재하겠다’가 아니라 ‘제재할 수도 있다’에 가깝다. EU와 일본 등은 이미 제재를 발표했다.
이를 두고 문 정부가 이처럼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미국 주도의 제재에 참여하는 듯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얻는 실익이 무엇이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이미 ‘첫차’는 놓친 데다, 이처럼 마지못해 동참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생색내기’조차 어려워졌다는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합병 때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공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며 러시아를 규탄했지만, 독자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국 주도 제재에 불참한다는 명시적 입장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실제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전면 중단함으로써 제재를 가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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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반도 때는 '암묵적' 동참
당시 정책 결정 과정에 관여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미국이 강력한 금융 제재를 취하면 한국이 명시적으로 독자 제재를 가하고 말고를 떠나 어차피 러시아와 비즈니스를 지속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군인이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 AP=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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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번에도 미국이 예고한 대로 반도체 분야에 대한 광범위한 제재에 착수한다면 한국 반도체 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반도체 기술과 장비 등 관련 협력에서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현 상황에서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어렵다는 기본 입장은 그대로이지만, 상황이 더 악화해 실제 침공이 이뤄질 경우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제재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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