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구박물관 마지막 6권 펴내…"신라 순장 풍습 확인"
대구 달성 유적에서 나온 거북모양 토기 |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제강점기에 조사가 이뤄졌으나 성과가 학계에 제대로 보고되지 않은 '대구 달성유적' 조사 내용을 우리 시각으로 재정리한 보고서가 완간됐다.
국립대구박물관은 2014년 첫 책을 펴낸 '대구 달성유적' 보고서의 마지막 책인 제6권을 최근 발간했다고 14일 밝혔다.
대구 달성유적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자 삼국시대 토성인 대구 달성(達城)과 주변 고분군을 아우르는 곳으로, 고대 대구 지역 정치체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는 1914년 대구 신사로 향하는 진입로 확장 공사에 참여해 달성 성벽을 조사했고,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 등은 1923년 택지 조성 과정에서 발견된 고분군을 발굴했다.
하지만 당시 조사자들은 상세한 도면과 사진자료 등을 생략해 보고했고, 조사 이후 고분군은 도굴을 겪었다. 광복 이후에는 도시화로 인해 고분군의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대구 달성' 보고서 |
보고서 1권은 달성 조사 성과를 전반적으로 소개했다. 1913년 수습된 '거북모양 토기' 등 유물 160점에 관한 정보도 담았다.
2∼5권은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고분 34호, 37호, 50호, 51호, 55호, 59호, 62호, 65호 등 8기와 출토 유물 1천568점을 자세히 다뤘다.
6권에는 국립대구박물관이 영남고고학회와 함께 2020년 12월에 연 학술대회 발표문과 토론 녹취록을 보완해 수록했다.
박물관은 보고서 발간을 계기로 고대 대구 지배집단이 신라 중앙정부 지원을 받아 고분을 축조했음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달성 고분군은 봉분 분포를 기준으로 했을 때 7개 내외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커다란 판석으로 석곽(石槨·돌덧널)을 만든 37호와 55호를 포함한 그룹이 중심 집단이었다"며 "이 집단은 신라식 금동관, 은제 허리띠 등 신라식 위세품을 집중적으로 부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 학자들은 일부 고분에서 석곽에 스며든 빗물과 토사가 유골과 부장품 위치를 흩뜨렸다고 봤지만, 37호분에서 주인공 두개골과 치아가 떨어져 있었던 것은 신라 순장 풍습 때문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국립대구박물관은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달성 고분 축조 당시 대구 지역 세력이 신라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했고, 주변 지역과 교류를 통해 장신구와 마구 등을 독자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짚었다.
대구 달성 고분군 55호분 출토 큰칼 |
대구 달성유적 보고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소속박물관이 추진하는 일제강점기 자료 조사 정리사업 일환으로 나왔다.
국립대구박물관 관계자는 이 사업에 대해 "일제강점기에 관학 아카데미즘을 기초에 두고 일본어로 발간된 고적조사 결과물을 21세기 한국 학문 역량으로 재해석해 공개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식민지 정책의 본질을 이해하고 학문 분야에서 탈식민화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대구 달성 고분군 37호분 출토 금동관 |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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