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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이슈 미술의 세계

[모던 경성]밀레는 어떻게 조선 최고의 인기 화가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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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90년전 이발소와 학교 교실에 ‘만종’, ‘이삭줍기’...20세기초 일본의 밀레 열풍 영향

조선일보

밀레가 서른 무렵인 1845년~1846년에 그린 자화상. 밀레는 20세기 초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서구 화가였다. 소년 박수근은 밀레 그림을 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유치원생 천경자도 이발소와 학교 교실에서 '만종'을 봤다고 회고했다. /Willyman,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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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한파는 덕수궁을 찾기에 딱 좋은 날씨다. 6·25직후 살얼음 같은 세월 속에 봄을 기다리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부제는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 ‘국민화가’ 박수근(1916~1965)이 주인공이다.

전시장 1층 첫번째 방에 들어서면 ‘밀레를 사랑한 소년’ 안내문이 맞는다. “하나님, 나는 이담에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강원도 양구 시골 소학교에 다니던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보고 감동을 받아 화가가 됐다고 한다. 원화(原畵)가 아니라 화집에 실린 복제화를 봤을 것이다. ‘만종’은 열두살 소년의 운명을 바꿀 만큼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 화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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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1일까지 덕수궁에서 열리는 박수근 특별전. 1층 전시장 입구엔 '밀레를 사랑한 소년' 박수근 안내문이 붙어있다. 박수근은 열두살 때 밀레 그림을 보고, 화가의 꿈을 키웠다./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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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전에 나온 1954년 작 '길가에서(아기업은 소녀)'. 창신동 시절 큰딸 박인숙씨를 모델삼아 그렸다고 전해진다./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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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생 천경자가 이발소에서 본 ‘만종’

천경자(1924~2015) 화백도 증언했다. 지금부터 딱 50년 전 덕수궁 석조전 본관(현 대한제국역사관)에서 열린 ‘프랑스명화전’에 나온 밀레 그림을 보고나서다. 이 전시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공수해온 ‘양치는 소녀’, ‘소치는 여인’ 등 유화 5점과 데생 등 밀레 작품 20여 점이 걸렸다. 조선일보 주최였다.

천 화백은 유치원 때 아버지와 함께 간 이발소에서 ‘만종’을 봤다며 밀레와의 첫 만남을 추억했다. 소학교 5학년 때 교실에도 ‘만종’이 걸렸었다고 했다. ‘이삭줍기’와 함께였다.( ‘밀레특별전을 보고’, 조선일보 1972년8월29일)

90년 전 소학교 교실과 이발소에 그림이 붙어있을 만큼, 밀레는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하고 인기있는 서양화가였다. 마네,모네나 고흐, 고갱, 그도 아니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르네상스 거장보다 밀레가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 사연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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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린 밀레 대표작 '만종'과 '이삭줍기'. 4년전 여름 들렀는데, 아득한 옛날같다. 1930년대 조선의 이발소와 학교 교실엔 이 그림 복제화가 많이 걸렸다. 해방후 1980년대까지도 그랬다./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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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6월30일자 '시대일보' 1면에 실린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시대일보는 육당 최남선이 1924년 창간한 일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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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김찬영의 밀레 소개

초기 서양화가 김찬영(1889~1960)은 1920년 이런 글을 썼다. ‘밀레라 하면 근대인으로는 어떠한 인물인 줄을 모를 사람이 없겠다. 그러나 천재를 구비한 밀레도 당시에 묘출한 명작을 세상에 공포하고 일반 공중 및 미술비평가들에게 ‘예술의 반역자’라는 혹평과 위협을 당했다. 그것이 오십 년 후 19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인생의 대복음이라는 찬언까지 받게 된 것이다.’( ‘서양화에 대한 계통及사명’2,동아일보 1920년 7월21일)

미술사학자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따르면, 조선에서 밀레를 소개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글이다. 이 글만 보면, 밀레는 100년 전 경성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것 같다. 김찬영은 고희동, 김관호에 이어 세 번째로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를 나와 1917년 귀국 후 고향 평양에서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였다. 106세 현역화가 김병기의 선친이기도 하다. 김찬영은 ‘폐허’ ‘창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글을 썼다. 1930년대 들어 고미술품 소장가로 이름났는데, 최근 경매에 나와 논란이 된 간송 컬렉션의 ‘금동계미명(癸未銘)삼존불입상’(국보 제72호)이 그의 소장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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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주는 모윤숙의 시를 밀레의 '만종'에 빗댔다. '씨(氏)의시(詩)는 『말레—』 만종(晚鍾)이란그림을보고 짓는 때가 만흔지 아둑—하고 거룩하고 애틋하고 설어웁고 정(情)겨웁고 한맛이 잇는것이 간도(間島)의눈뿐아니라 서백리아(西伯利亞)의 눈까지도 녹일만하게 온기충일(溫氣充溢)의시(詩)다.' 조선일보 1933년 2월8일자에 실렸다.


◇밀레 애호가 안석주

밀레를 신문, 잡지에 자주 등장시킨 평론가는 석영 안석주(1901~1950)였다. 1920~1930년대 조선일보에 만문만화를 연재하고, 학예부장을 지낸 그 안석주다. ‘밀레는 본시 농촌에서 자라나서 그는 농촌의 풍정을 그리었나니 ‘만종’(晩鍾)이 그의 일품에 하나다…'만종’이 그의 일생중 가장 적빈할 때에 제작한 것이니 그는 농촌의 형제자매에게 이 만종을 통하야 새로운 종교를 보여주었는 바 그의 숙부와는 달리 무저항주의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찰나찰나에 관자(觀者)로 하여금 안위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라 하겠다.’(‘美展印象’2, 조선일보 1929년9월7일)

동경에서 미술 유학을 했던 안석주가 작가 등용문이던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을 둘러보고 쓴 인상기였다. 앞서 1925년 개벽사에서 발간하는 잡지 ‘신여성’에 ‘전원화가 밀레’란 글도 썼다. 밀레는 ‘노동의 정체’를 보여주고, ‘평화와 인류애를 밝히 가르쳐준 성자’였지만, 박해와 중상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한해 전 경성제일고보에 다니던 김주경(1902~1981) 그림에 대해 ‘군(君)의 작품을 대할 때 밀레의 모든 것이 추억된다’( ‘제2회 고려미전을 보고서’, 조선일보 1924년10월27일)고 쓸 만큼, 밀레는 그의 이상이었다.

모윤숙의 시를 밀레의 ‘만종’에 빗대기도 했다. ‘씨(氏)의 시(詩)는 『밀레—』 만종(晚鍾)이란그림을보고 짓는 때가 만흔지 아둑—하고 거룩하고 애틋하고 설어웁고 정(情)겨웁고 한맛이 잇는것이 간도(間島)의눈뿐아니라 서백리아(西伯利亞)의 눈까지도 녹일만하게 온기충일(溫氣充溢)의시(詩)다.’( ‘라인강반의 梳頭姬, 月岸 모윤숙씨’, 조선일보 1933년 2월8일)

◇스물한살 팔봉 김기진의 밀레

밀레는 작가, 화가들이 자주 소개한 서구 화단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스물 한살 팔봉 김기진은 1924년 이런 글을 썼다. 예술운동이든, 사회운동이든 사람이 하는 운동이니 사람을 속박하지 말라. 나는 ‘아나’(아나키스트)도 테러리스트도 니힐리스트도 아니다. 다만 사람일 뿐이다. 그러다 밀레를 떠올린다. ‘나는 밀레의 그림을 생각하였다. 무엇이 귀한가를 생각해 보았다. 어떠한 것을 바라고 살아야만 할까를 생각하였다.’( ‘온돌만필’, 조선일보 1924년11월3일)

좌파 문예단체인 파스큘라와 카프 창립에 뛰어든 청년 김기진에게도 밀레는 우상이었다. 해방 후 월북해 북에서 만경대 묘향산을 그린 김주경도 1937년11월 ‘세계명화 이면의 일화’란 제목으로 밀레의 일생을 동아일보에 3번에 걸쳐 연재했다.

◇이와나미 서점의 심벌 ‘씨뿌리는 사람’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따르면, 밀레는 1930년대쯤 한국, 일본, 중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였다. 이발소나 집집마다 ‘만종’이나 ‘이삭줍기’ 복제화가 걸렸다. 조선의 밀레 열풍은 일본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선 1890년 제2회 메이지미술전람회에서 밀레의 ‘군상’ ‘만추’ 2점이 바르비종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처음 전시됐다. 앞서 일본 서양화 거장 구로다 세이키(黑田 淸輝·1866~1924)가 프랑스 유학시절인 1875년 바르비종 밀레의 집을 찾는 등 19세기 말 바르비종을 직접 찾는 일본인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밀레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밀레화보’가 1903년 가보샤(畵報社)에서 나오는가 하면, 1906년 서구화가 개인화집으로는 처음으로 ‘밀레명화전집’ (전3권)이 세카이샤(精華社)에서 출간됐다. 화가뿐 아니라 문인들이 밀레의 작품과 생애에 대해 문예잡지에서 언급하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1910~1920년대 밀레에 대한 단행본과 번역서가 많이 나오면서 밀레의 대중적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특히 1933년 창간한 출판사 이와나미(岩派)서점이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을 상표로 쓰면서 대중에게 익숙해졌다. 이런 일본의 밀레 열풍이 유학생이나 그림, 화보집을 통해 소개되면서 1920년대 조선에서도 근대 서양화단을 대표하는 외국 작가로 떠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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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50년 전인 1972년8월 덕수궁 석조전 본관에 루브르 박물관 소장, 밀레의 작품이 전시됐다. '양치는 소녀' '소치는 여인' 등 유화 5점과 데생 등 20여점이 포함된 '프랑스명화전'이었다. 조선일보 주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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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여덟 천경자의 ‘만종’

50년 전 덕수궁서 밀레 원작을 본 천경자 화백은 젊은 날에 다시 만난 ‘만종’을 얘기했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젊었던 시절은 아주 칠흑같이 불행하고 가난했던 세월이었다. 어느 해 병으로 가난속에서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갔었다…확실히 의식을 되찾고 보니 병원 벽에는 단 하나 퇴색한 ‘만종’이 걸려있었다. 나는 반가와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하고 대화를 했다. 그림의 말은 나의 온갖 굴욕과 가난의 시련, 또 아픈 세례를 달래주고 오붓한 평화를 되찾게 해주어 나는 눈물을 흘릴 수있었다.’(’밀레특별전을 보고’,조선일보 1972년 8월29일)

씨뿌리기나 가축 돌보기 같은 농민의 노동을 소재로 삼은 밀레처럼, 박수근은 농촌 여성의 가사 노동, 도시 서민의 소박한 삶을 많이 그렸다. 미술사학자 김영나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인내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농촌의 농민과 도시 서민들의 삶의 진실성을 그렸고, 이것이 그가 밀레의 작품에서 받은 가장 큰 교훈이었다’(‘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도록 70쪽, 2022)고 했다.

이발소 그림이나 달력 속 ‘만종’과 ‘이삭줍기’는 지금도 추억에 남아있다. 1950년대~1960년대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밀레의 전기가 실렸던 적도 있었다. 20세기 전반 농촌사회였던 조선에서 밀레 그림은 익숙한 풍경이었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된 지난 세기 후반에도 우리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만종’과 ‘이삭줍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렇게 밀레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됐다.

◇참고자료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도록, 2022

안석주, 전원화가 밀레, 신여성 1925년2월

김영나, 20세기의 한국미술 2, 예경, 2010

대한뉴스 제894호, 밀레특별전, 1972년8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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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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