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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아무튼, 주말] ‘보드카 마시자’는 제안은 ‘살길을 찾자’는 의미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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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의 필름위의 만찬] 영화 ‘그래비티’와 보드카

조선일보

영화 '그래비티'에서 보드카가 등장하는 장면./워너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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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면 내일 귀환해서 한잔 살게요.” “그거 좋죠. 참고로 우린 마르가리타(테킬라, 라임즙 등으로 만든 멕시코 칵테일)를 좋아해요.”

마냥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우주, 왕복선 STS-157팀이 한창 임무 수행 중이다. “휴스턴, 이번 임무 예감이 좋지 않아.” 팀의 리더인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가 잡담이나 하려고 운을 뗀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 걸까? 정말 위기가 닥쳐온다. 러시아에서 환경 정리차 폭파한 인공위성의 파편이 들이닥친 것이다. 결국 팀원 두 명이 죽고, 코왈스키와 의사이자 임무 전문가 라이언 스톤(샌드라 불럭) 박사만 남는다.

“5분이면 도착해서 보드카를 찾을 수 있지.” 두 사람은 간신히 서로를 찾아 연결된 채로 대안인 러시아의 우주정거장을 향해 간다. 호흡용 산소와 추진기의 동력이 떨어지기 직전에 우주정거장에 도착하지만, 충돌의 충격으로 코왈스키가 튕겨 나간다. 스톤 박사가 간신히 그를 부여잡지만 끌어당기지는 못하자 코왈스키는 자신을 분리해 버린다. 그렇게 우주 경험이 처음인 스톤 박사는 혼자 남아 지구 무사 귀환을 모색한다.

예측 못 했던 시나리오에 경험 부족이 겹쳐 정신 줄을 놓았던 스톤 박사는 점차 이성을 되찾고 생환 계획에 집중한다. 고장 나 지구 진입은 불가능한 러시아의 비상 탈출정을 타고 중국의 우주정거장까지 이동해 귀환하는 계획이다. 그러나 막상 실행에 옮겨보니 예상대로 일이 진척되지 않고,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우주는 무서울 정도로 적막하고 춥다.

결국 러시아의 비상 탈출정 조종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삶을 포기할 생각을 하는 가운데, 죽은 줄 알았던 코왈스키가 조종석 해치를 열고 탈출정으로 들어온다. “솔직히 무지하게 반갑네. 해낼 줄 몰랐거든.” 코왈스키는 조종간 밑에 숨겨 둔 보드카를 한 모금 빨아 마시고는 실의에 빠져 있는 스톤 박사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우주에서 유영한 거야? 그렇다. 사실 코왈스키는 한참 전에 죽었고 스톤 박사는 환상을 보았다.

러시아라면 당연히 보드카일 수밖에 없지만, 큰 그림에서 한 켜 더 덧씌운 상징을 읽었다. 보드카를 비롯한 도수 높은 증류주의 명칭은 전부 ‘생명의 물’ 변주에서 왔다. 보드카(voda·물)를 필두로, 와인을 증류해 만든 브랜디(brandy)를 다시 한번 증류한 오드비(eau de vie·생명수), 북유럽의 아쿠아비트(aquavit·역시 생명수) 등이다.

그렇다면 코왈스키가 러시아 우주정거장에 가서 보드카를 마시자는 제안은 곧 살길을 찾자는 의미 아니었을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미 죽은 코왈스키의 환상이 보드카를 찾아주는 것 또한 스톤 박사가 품는 생의 의지, 혹은 그에 따른 무사 귀환의 암시로 이해할 수 있다.

특유의 알코올 향을 품고는 있지만 무미 무취에 가까운 보드카는 어떤 음식과도 무난하게 어울린다. 정통 러시아식으로는 캐비아(철갑상어 알)에 블리니(메밀 전병), 사워크림 등과 같이 먹지만 현실에서는 감자 샐러드를 안주 삼으면 맛있다. 어차피 원조는 증류식이니 한식이라면 소주 자리에 보드카가 두루 제 몫을 할 수 있다.

브랜드를 막론하고 750ml 한 병을 2만원대 후반이면 살 수 있는 이른바 ‘가성비’ 좋은 술이 보드카인데, 그 가운데서도 우두머리는 있다. 바로 코스트코 자체 브랜드 ‘커크랜드’의 보드카이다. 1.75L 대용량 1병에 미국산이 1만1690원, 프랑스산이 2만3990원이니 소주보다 쌀 지경이다. 특히 관련 업체는 부인하지만, 프랑스산은 프리미엄 보드카 브랜드 ‘그레이구스’ 공장에서 생산한다는 소문이 돈다.

코왈스키의 환상이 사라지고 난 뒤, 스톤 박사는 정신을 가다듬고 단 한 번뿐인 지구 귀환 시도에 성공한다. 그렇게 돌아온 스톤 박사의 머릿속에는 어떤 술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까? 휴스턴에서 같이 먹자는 마르가리타였을까, 아니면 코왈스키의 환상이 찾아준 보드카였을까?

[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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