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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236] 어른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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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다고 모두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영영 나잇값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어린 나이에도 어른스러운 사람이 존재한다.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됐다고 느낄까. 생각해보면 내게 그런 순간은 2002년 여름에 찾아왔다. 국민 모두가 열광하던 한일 월드컵. 내게는 끝내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골을 넣고 열광하던 한국 선수의 얼굴이 아니라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얼굴로 자신의 실책을 괴로워하는 한 선수의 얼굴이었다. 호아킨 산체스.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나는 그 스페인 선수의 이름을 아직 기억한다.

그 후, 이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렸고, 읽을 수 없던 ‘행간’이 보였다. 상식을 ‘역지사지’하는 능력이라고 말하던 선배의 말처럼 나는 타인의 마음을 조금씩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짐작건대 그 순간이 내가 작가로 다시 태어났던 때였던 것 같다.

축구 경기에서 골이 터지면 골을 넣고 환호하는 선수의 얼굴이 아니라, 일그러진 상대편 골키퍼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누군가의 성공보다는 실패에 훨씬 더 마음이 갔다. 소치 동계 올림픽 때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던 건, ‘김연아’의 완벽하게 아름다운 점프가 아니라,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 악셀 실패였다.

그때, 마오가 엉덩방아 찧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김연아 같은 완벽한 선수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오로지 트리플 악셀을 해내는 것뿐이라, 실패할 걸 알면서도 도전하는 ‘그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를 ‘태릉선수촌의 유령’이라고 말했던 스케이터 이규혁이 마지막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은퇴를 선언한 후, 기자에게 했던 말도 기억난다. “안 되려는 걸 하려니까 슬펐어요”라는 가슴 무너지게 아픈 말.

‘가장 잘하고, 가장 사랑했던 것’에서 우리가 더 많이 상처받고, 성장한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끝내 어른이 되어간다. 활짝 핀 꽃이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건, 그 아름다움이 곧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걸 아는 사람처럼.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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