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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1.5평에도 머물 형편 안돼… 고시원에서도 밀려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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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5만원 못내 쪽방촌·고향으로…

과거엔 불황때 오히려 꽉 찼는데 인력시장옆 고시원 방 절반 ‘텅텅’

확진자 생기면 자가격리해야돼 일 못 할까봐 원룸 택하기도

지난 13일 찾은 서울 금천구의 한 고시원은 방 37개 중 절반이 비어 있었다. 코로나 사태 전만 해도 새벽 인력시장에 가는 일용직 노동자들로 만실(滿室)이었던 곳이다. 방 하나가 5㎡(1.5평) 남짓한 크기이고 화장실과 주방, 샤워실은 함께 쓰지만 취약 계층의 쉼터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이들이 이곳에서조차 밀려난 것이다. 이 고시원 원장 김미경(56)씨는 ”그간 직원을 안 써 인건비를 아낀 덕에 그나마 버텨왔지만, 빈방이 늘어 새해부턴 어쩔 수 없이 방값을 월 25만원으로 2만원 올렸다”고 했다. 어차피 들어올 사람이 많지 않다고 보고 방값을 올린 것이다.

조선일보

지난 13일 서울 금천구 한 고시원의 모습. 성인 남성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 70㎝ 복도 옆으로 5㎡(약 1.5평) 크기의 방들이 늘어서 있다. 새벽 인력시장에 가는 일용직 노동자 등 취약 계층들로 북적였던 이곳은 최근 거주자가 줄면서 절반이 비었다. /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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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은 1980년대만 해도 서울 노량진·신림동 일대의 유명 고시학원과 대학가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사법시험, 취업 등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보증금도 없고 월세도 저렴해 IMF 외환 위기 이후부터는 학생보다 영세 자영업자나 일용직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등 취약 계층이 대거 몰리는 ‘불황의 아이콘’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코로나 2년을 겪으며 고시원에도 머물기 힘든 취약 계층이 늘어나면서 고시원조차 불황을 겪고 있다.

지난 10~13일 기자가 서울 관악구·종로구·금천구·구로구·영등포구 등의 고시원 25곳을 찾아가 보니 이 중 15곳은 절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고시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코로나 사태가 이어지면서 고시원에 살던 사람들 다수가 더 열악한 환경으로 밀려가는 것 같다”고 했다.

가장 먼저 버티지 못하고 떠난 것은 식당 종업원이나 유흥업소 직원 등이라고 한다. 일감이 줄자 월세 20만~35만원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서울 다른 지역의 쪽방촌으로 가거나 아예 지방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종로구에 있는 고시원 거주자인 남재영(67)씨는 “코로나로 종로 상권이 가라앉는 바람에 이 일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30~40대 여성이 최근 많이 사라졌다”고 했다. 인근 고시텔 총무 김모(48)씨는 “일자리가 없다며 농사짓겠다고 고향으로 떠나는 사람도 봤다”고 했다.

공사 현장 등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도 고시원을 등지고 인근 반지하·원룸 등으로 갔다고 한다. 이들에겐 자가 격리가 특히 문제였다. 화장실⋅샤워실을 공유하는 고시원에선 확진자가 한 명이라도 나오면 입주자 상당수가 최대 2주 격리돼 일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구로구 인력 시장 근처 한 고시원은 작년 9월과 11월 확진자가 1명씩 두 차례 나오면서 방 54개 중 20개가 비었다고 했다. 서울 남구로역의 인력 시장 인근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는 김삼수(65)씨는 “주변 고시원 5곳 중 3곳이 최근 폐업했다”고 했다.

일자리를 잃고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노동자도 많다. 서울 구로구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는 최재용(53)씨는 “여기 살던 사람 90%는 조선족이었는데, 코로나로 한국을 떠났다가 못 들어오고 있다”며 “비자 발급도 까다롭고, 입국 이후 격리도 부담이 되고 한국에서 일자리도 많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악구에서 고시원을 운영하는 이옥선(65)씨는 “불경기면 고시원에 많이 와야 되는데 코로나가 이동을 꽁꽁 막아버려 유입이 없다”며 “운영비도 못 건지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가 최근 발표한 ‘고시원 주거 환경 개선안’이 자칫 취약 계층을 더 열악한 곳으로 떠밀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시는 7월부터 신축·증축하는 고시원은 방 하나 면적이 최소 7㎡ 이상 되도록 하고 건물 밖으로 뚫린 창문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 경우 월세가 오를 수밖에 없다는 게 고시원 관계자들 얘기다. 서울 용산구 고시원에 사는 권현철(50)씨는 “요즘 고시원엔 학생은 거의 없고 대부분 취약 계층만 남았다”며 “고시원 월세마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월세 10만원대의 더 열악한 쪽방촌으로 가는 상황”이라고 했다.

[윤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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