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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성범죄 피해자 진료·신체감정 요청…이대로 괜찮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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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진료기록 감정 요청 증가세

성범죄 가해자들 ‘밑져야 본전’식

재판 길어지고, 피해회복도 지연

“성범죄 말고 다른 형사사건에서

피해자 감정 이렇게까지 하나?”

전문가들 지적 “제동절차 없어”


한겨레

지난해 6월 직원 강제추행치상 혐의를 받는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재판장으로 들어가고 있다.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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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돈이 아닌 저의 정신상태를 재감정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저 사람들(오거돈측 변호인)이 한 달이나 재판을 연기한 이유다. (…) 대학병원을 포함한 3개 병원에서 감정받은 제 상태는 제발 그만 따져 묻고, 오거돈 당신 정신 감정이나 받아보길 바란다.”

지난해 9월9일 오거돈 전 부산시장 강제추행 피해자 ㄱ씨가 낸 입장문 일부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 받은 오 전 시장은 항소심 첫 공판을 앞두고 법원에 “피해자 진료기록을 감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피해자가 겪고 있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강제추행으로 유발된 것인지를 다시 판단해 달라는 의도였다. 만약 PTSD와 강제추행 사이 인과성이 없다고 결론 나오면 오 전 시장의 주요 혐의는 ‘강제추행 치상’에서 ‘강제추행’으로 바뀌고 형량도 줄어들 여지가 생긴다.

오 전 시장 측의 갑작스러운 ‘피해자 진료기록 감정촉탁’ 요청으로 공판은 8월에서 9월15일로 한 달 가까이 연기됐다. 그 후로 열린 세차례 공판(9월15일, 10월13일, 11월3일)에서 재판부는 “진료기록 감정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재판 진행이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감정 결과는 12월13일 열린 결심공판에서야 공개됐다. 법원이 대한의사협회에 의뢰한 진료기록 감정촉탁 결과는 “명확한 트라우마(오 전 시장의 범행)가 존재하며, 이로 인한 PTSD에 해당한다”였다. 가해자가 감경 가능성을 탐색하는 동안 피해자는 연기된 재판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고통받아야 했다. 오 전 시장에 대한 항소심 선고는 오는 19일 예정되어 있다.

‘진료기록 감정’은 오거돈 전 시장 같은 권력형 성범죄 사건에서만 등장하는 이례적인 절차가 아니다. 최근에는 일반 성범죄 사건에서도 피고인의 요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피해자 진료기록 감정이 이뤄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지난달 17일 한국성폭력상담소와 서울대학교 공익법률센터가 공동으로 ‘피해자 진료기록 재감정,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이름의 집담회를 개최한 배경이다.

감정촉탁이란 법관이 전문성을 갖춘 외부 기관에 의뢰해 사실 확인·판단에 도움을 구하는 절차다. 진료기록 감정촉탁은 법관이 의료기관에 의뢰해 피해자나 피고인의 진료기록을 해석하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법원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피해자의 의료기록 뿐 아니라 피해자의 신체(정신 포함) 감정을 촉탁하기도 한다.

법관이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의 견해를 참조하는 일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러나 성범죄 피해자의 진료기록·신체에 대한 감정촉탁이 남발되는 것은 다른 ‘맥락’과 ‘여파’를 지니기에 보다 신중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피해자 진료기록 감정이 증가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가해자들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피해자 진료기록에 대한 감정을 요청하고, 재판부도 이를 별 문제의식 없이 수용하는 일이 이전보다 자주 빚어지고 있다”고 했다. 가해자들이 피해자가 제출하는 진료기록을 무효화해 자신의 형량을 줄이거나, 재판 자체를 지연시켜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감정촉탁을 요청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아니면 말고 식’의 남발이다. 가해자를 조력하는 법률시장이 성장하고, 피해자에 대한 공격도 하나의 전술이자 상품이 되면서 피해자 진료기록·신체도 ‘검증’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진료기록 감정촉탁은 가해자에겐 ‘감경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피해자에게는 ‘고통의 연장’을 의미할 뿐이다. 오 전 시장 사례에서 보듯, 감정촉탁 채택으로 재판 일정이 연기되는 일은 다반사다. 진료기록 감정이 아니라 신체 감정일 경우 기간은 더 길어진다. 이날 집담회에 참석한 장형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 소장은 토론문에서 “(법원으로부터 감정촉탁을 의뢰받은 기관이) 어렵다고 회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그런 거절 회신조차도 2∼3달 후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 신체감정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며 “이 경우 법원은 전문가의 감정 의견 없이는 재판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일추정’(다음 기일을 특정해 잡지 않고 추후로 미룸)을 선언하고, 기약 없이 재판이 길어지게 된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피해자 김지은씨다. 지난 2019년 안 전 지사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지은씨는 안 전 지사 등을 상대로 민사재판인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재판부는 첫 변론기일인 지난해 6월에 김지은씨에게 ‘손해를 증명하기 위해 신체감정을 받으라’고 권했다. 이후 두번째 변론기일이었던 9월17일 재판부는 “신체감정 결과가 나와야 재판을 진행할 수 있다, 다음 기일은 추후 지정하겠다”며 ‘기일추정’을 선언했다. 이날 이후 재판은 멈춘 상태다. 대법원이 안 전 지사의 성폭행 행위가 분명히 있었다고 판단했는데도, 민사소송에서 피해자는 재차 신체감정을 받아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김씨처럼 신체감정으로 재판이 길어지고 피해 회복이 지연되는 사례는 적지 않다. 성폭행 피해자 ㄴ씨의 경우도 비슷하다. 가해자가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았음에도 민사 재판부는 ㄴ씨에게 ‘신체감정’을 권했다. 재판부가 감정촉탁을 의뢰한 의료기관은 이를 거부해 ‘기일추정’이 선언됐다. 미성년 성범죄 피해자 ㄷ씨는 원스톱 지원센터를 통해 의료기록을 제출했으나, 피고인 쪽이 다른 의료기관에서 다시 진단받을 것을 요구하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산부인과 2∼3곳을 전전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취합한 사례의 일부다.

재판 지연은 피해자가 ‘피해자 정체성’에 머물러야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한다. 보통 성범죄 피해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소송(민사)은 형사재판 결과가 나온 뒤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사건 발생 이후 수년이 흐른 시점에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야 각종 감정에서 피해를 인정받기 수월해지는 역설적인 구조다. “진료기록감정에 관한 실무 관행은 아직 ‘매뉴얼화’되지 못한 상황”(조정민 판사·법원내 연구모임 ‘현대사회와 성범죄연구회’)이어서 무분별한 감정촉탁에 제동을 거는 공식적인 절차도 없다. 김혜정 소장은 “성폭력이 아닌 다른 범죄의 피해자도 이렇게 의심받고, 재차 확인받는 과정을 거치는지, 심지어 가해자가 재판부의 양형 판단을 위해 제출하는 자료(복용약, 지병, 건강기록 등)도 이렇게까지 감정, 재감정하는 사례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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