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7 (토)

‘北에 줄돈, 국군 포로 배상엔 못쓴다’ 판결... 법조계 “이례적 판단”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북한 ‘비법인사단’ 아니다” 라며 원 배상 판결과 정반대 판단

법조계 “집행단계에서 있기 힘든 이례적인 판단”

조선일보

2019년 6월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국군 포로 강제노역, 북한과 김정은은 배상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탈북 국군 포로 2명이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지원하고 있다./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법원이 6·25 때 북한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을 한 국군 포로들이 북한 정부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서 받아야 하는 손해배상금을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으로부터 대신 받을 수 없다고 14일 판결한 것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이례적인 판단”이라는 말이 나왔다.

서울동부지법 민사1단독 송승용 부장판사는 이날 국군 포로 노사홍(93), 한재복(88)씨가 경문협을 상대로 제기한 추심금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북한은 경문협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는 ‘비(非)법인사단’으로 보기 어렵고, 경문협이 공탁한 저작권료도 북한 정부가 아니라 북한에 있는 작가 등 저작권자의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재판부가 북한이 비법인사단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부분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법조계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다. 앞서 있었던 손해배상 소송의 재판부는 북한이 비법인사단임을 전제로 북한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는데, 배상금을 받기 위해 진행되는 후속 소송에서 이 판단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손해배상 재판부는 북한이 ‘비법인사단’이라며 배상책임 인정

이 추심금 청구 소송은 국군 포로 두 사람이 북한 정부와 김 위원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후속 절차로 이뤄진 것이다. 2020년 7월 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김영아 판사는 “북한 당국이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원을 줘야 한다”는 북한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우리 법원이 북한과 김 위원장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북한이 항소하지 않아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이 판결에서 재판부는 북한이 비법인사단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민법에서는 단체도 사람처럼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법인(法人)’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법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등록하지 않았어도, 법인과 유사하게 단체로서의 실질을 갖추고 있는 경우 예외적으로 ‘비법인사단(非法人社團)’이라고 해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성을 인정해 준다. 북한은 우리 헌법상 국가로 인정되지 않지만, 손해배상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단체성을 갖추고 있다는 게 손해배상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법원은 이 판결에 따라 경문협에 채권압류 및 추심명령을 내렸다. 경문협은 조선중앙TV 등의 북한 저작물을 사용한 국내 방송사들로부터 북한을 대신해 저작권료를 걷어 2004년부터 북한에 송금해왔다. 하지만 2007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 여파로 송금이 금지되면서 2008년부터 최근까지 20억원가량을 법원에 공탁해 놨다. 법원은 노씨 등이 이 돈을 압류해 배상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경문협 측이 돈을 주지 않자 추심금 청구 소송을 냈다.

◇법조계 “집행 단계에서 본 판결의 주요 판단 뒤집는 것은 이례적”

추심금 청구 소송은 손해배상 판결의 배상금을 직접 받기 위한 집행 과정에서 진행되는 절차다. 여기서 재판부가 “북한은 경문협으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는 비법인사단으로 보기 어렵다”며 원 판결을 뒤집는 판단을 내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원고 측 대리인들은 “집행 과정인 추심금 청구소송에서 원래 손해배상 소송의 판단을 뒤집는 이런 괴이한 판결은 처음 본다”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고법 부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북한이 비법인사단으로 배상 주체가 된다는 판단은 북한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핵심 논거 중 하나인데, 이를 정면으로 뒤집은 이례적인 판결”이라며 “집행 단계에 불과한 추심금 청구 소송에서 본 판결에서 내린 주요 판단을 뒤집는 게 과연 가능한지 법리적으로 따져 봐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른 변호사는 “추심금 청구 소송은 북한이 경문협으로부터 받을 돈으로부터 손해배상금을 충당하는 것이 적당한지를 판단하는 과정”이라며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여러 이유 중 굳이 원 판결이 ‘북한이 비법인사단이다’라고 판단한 부분을 집어 건드린 것은, 여기에 정면으로 도전하겠다는 취지로 읽힌다”라고 분석했다.

◇판결 내린 판사의 이력도 주목

논란의 판결을 한 송승용 부장판사는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소속이다. 그는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법원 내부망에 법관 인사와 대법관 제청 등에 관한 비판적 의견을 올린 후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돼 인사상 불이익을 얻었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을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과 관련, 이에 연루된 법관의 탄핵 필요성을 의결한 2018년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공보 역할을 맡기도 했다.

[류재민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