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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뉴스AS] 한국 기업끼리 합병을 왜 유럽이 불허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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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과점 다루는 경쟁법 역외적용 가능

현대중, 대우조선 인수땐 LNG선 61%

EU, 천연가스 수입국 많아 피해 우려


한겨레

대우조선해양(위)·현대중공업 조선소 전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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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끼리의 인수합병을 왜 유럽이 무산시키죠?”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가 유럽연합(EU) 경쟁당국의 퇴짜로 무산된 것을 두고 나온 질문들 중 하나다. 이번 인수는 유럽 말고도 중국과 일본 등에서 경쟁당국의 심사를 받았다.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 이뤄진 일을 외국 당국이 들여다볼 수 있는 근거는 뭘까.

일단 전통적인 개념의 속지주의나 속인주의는 잠시 잊을 필요가 있다. 시장의 독과점을 다루는 경쟁법은 기본적으로 역외 적용이 가능하다. 외국 기업이 외국에서 한 행위도 한국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국제 카르텔이나 다국적 기업의 인수·합병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외 적용이 도입된 배경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역외 적용도 무한정 가능한 건 아니다. 역외 적용의 범위를 정할 때는 보통 ‘영향 이론’이 기준이 된다. 국내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여야만 제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 예로, 한국 기업들이 특정 상품을 두고 가격 담합을 한 뒤 그 상품을 미국에 수출한다면, 미국 당국이 제재할 여지가 있다. 반대로 해당 상품이 미국에 수입되지 않는 등 미국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영향의 유무는 어떻게 따질까. 한국의 경쟁법인 공정거래법 3조는 “국외에서 이뤄진 행위라도 그 행위가 국내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이 법을 적용한다”고만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국가 간 교역이 활발한 시대에 국내 시장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조금도 미치지 않는 행위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자칫 경쟁법의 적용 범위가 무한정 확장될 수도 있는 셈이다.

힌트가 될 만한 판결은 2014년 항공화물 국제 카르텔 사건을 다룬 대법원에서 나왔다. 당시 대법원은 “(공정거래법 3조는) 문제된 국외 행위로 인해 국내 시장에 직접적이고 상당하며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로 제한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간접적인 영향만 미치거나 영향의 정도가 미미할 때는 역외 적용할 수 없다고 명시한 것이다. 대부분의 주요 경쟁당국도 비슷한 원칙을 채택하고 있다.

기업결합 심사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 간의 인수합병이라고 해도 유럽 시장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으면, 유럽 경쟁당국에서도 들여다본다. 기업결합 심사 대상의 기준에도 이런 점이 반영돼 있다. 한국 공정위는 외국 기업의 경우에는 한국 내 매출액이 300억원 이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추가로 두고 있다. 반대로 해석하면 기업의 글로벌 규모가 아무리 커도, 한국에서 올리는 매출액이 300억원 미만이면 굳이 심사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유럽연합도 비슷한 기준을 두고 있다. 결합하는 기업들 중 최소 두 기업이 유럽연합 내에서 각각 2억5000만유로(약 3000억원)를 넘는 매출액을 올리고 있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있다. 한국조선해양과 대우조선해양도 이런 기준을 충족했을 것으로 보인다.

‘영향 이론’의 원칙은 이번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가 내놓은 발표 자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집행위는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승인할 경우 유럽 시장이 입을 피해를 강조했다. 유럽에는 주요 천연가스 수입국들이 분포해 있는데, 이 중에는 액화천연가스(LNG)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전세계 엘엔지 운반선 시장에서 두 기업의 점유율 합계는 61.1%에 이른다. 다음은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부위원장이 발표한 입장문 중 일부다.

“유럽연합 내 에너지 소비량의 약 4분의 1은 천연가스에 해당하는데 대부분 수입산이다. (…) 대형 엘엔지 운반선이 엘엔지를 다른 지역에서 유럽으로 들여오는 만큼, 이번 사건에서 문제된 핵심 상품들은 엘엔지 공급사슬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 오늘 우리가 내린 결정은 유럽 선사들이 대형 엘엔지 운반선을 확보하는 데 있어 앞으로도 충분히 많은 선택지를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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