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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대영제국에서 온 편지] [19] 해적의 나라, 신사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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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의 목을 자르겠다.”

황금 검을 쥐고 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입에서 뜻 밖의 말이 나왔습니다. 주변에 있던 외국 사신과 신하들, 국민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이는 여왕의 진심이 아닌 농담이었습니다.

여왕은 곧 칼을 옆에 있던 프랑스 사신에게 넘겨주더니 영광스러운 ‘기사 작위’ 수여식을 거행해달라고 했습니다. 사신은 영국·프랑스가 함께 에스파냐에 맞서는 동맹을 추진하기 위해 주군인 프랑스 앙주공과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문제를 협상하러온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협상을 위해 온 프랑스 사신이 영국 여왕의 부탁을 받고, 에스파냐를 상대로 한 해적질로 유명한 영국 선장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이는 당시 영국 해적들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던 에스파냐에겐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왕이 결혼을 한 것도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살았으니까요.

조선일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스페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엘리자베스 1세의 초 상화. 그녀의 오른쪽 어깨 뒤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향해 돌진하 는 영국 함대가 그려져 있다. 여왕의 오른손 아래 놓인 지구의가 미래에 다가올 대영제국의 세계 지배를 예언하는 듯하다. 당시 궁정 화가였던 조지 가워(George Gower)의 작품


왕위에 오른지 벌써 23년. 엘리자베스 1세(1558~1603)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치 감각·능력을 가진 왕 중 한 명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 여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대륙의 수 많은 시선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의 역사’라는 책에서 이 장면에 대해 “아마도 에스파냐 왕에게 직접적인 모욕을 주는 한편,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반목시키려고 한 행위였을 것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또,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국’이라는 책은 “그녀의 이 행동은 펠리페(에스파냐의 왕)에겐 또 다른 도전장이었다”라고 했습니다.

1581년 4월 4일 런던 남동부 템스강 기슭 데트퍼드(Deptford). 부두에 정박해 있던 300t급 갤리언 ‘골든 하인드(Golden Hind)’에서 열린 드레이크 기사작위 수여식은 이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합니다. 2년 10개월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돌고 귀국한 프랜시스 드레이크…. 60년 전 마젤란 탐험대에 이어 두번째로 세계일주를 달성해 영국을 영광스럽게 만들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약탈 능력으로 엄청난 재물을 획득해 여왕께 바친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반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드레이크 경(Sir)’이라고 불리게 될 터입니다. 여왕은 그를 ‘우리의 황금 기사’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이 날의 의미는 여왕이 해적을 국가의 공신으로 정식 인정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7년 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것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5세기 중엽 앵글로색슨이 처음 잉글랜드 땅을 밟은 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의 영국 역사에서 손에 꼽는 명장면들이 있습니다. 바이킹 침입으로 거의 모든 영토를 잃은 알프레드 대왕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애설니섬에서 재기하는 장면, 시몽 드 몽포르가 ‘최초 의회’를 소집하는 장면, 헨리 8세가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장면, 청교도 혁명 때 크롬웰이 찰스 1세를 참수하는 장면, 입헌군주제를 수립한 명예혁명 등 …. 여기에 개인적으로 드레이크의 작위 수여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해적, 기사가 되다

잉글랜드 남서부 데본의 타비스톡에서 프로테스탄트 농부의 맏아들(12형제 중)로 태어난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탐험가이자 선장, 해적, 해군 장교, 정치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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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드레이크 선장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는 장면.(왼쪽) 영국 남부 항구도시 플리머스에 세워진 드레이크 동상(오른쪽)


어릴 때부터 뱃일을 했고, 20대에는 약탈과 노예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촌 존 호킨스의 선단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15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비즈니스’에 뛰어들었습니다. 특히 노략질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보다 항해술을 더 잘 알지 못한다”고 자랑했습니다.

1572년 파나마 지역의 스페인령 마을과 선박 등을 습격해 짭짤한 수익을 얻은 드레이크는 이듬해 다시 파나마 약탈에 나서 20톤의 금과 은을 노획하는 ‘대박’을 터뜨립니다. 플리머스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영웅’ 대접을 받았습니다. 스페인에선 ‘해적’으로 낙인찍였지만 말이죠.

파나마 지역 약탈로 이름을 날린 그에게 여왕도 큰 호감을 보였습니다. 1577년 여왕은 그에게 대서양을 넘어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과 태평양 지역 원정에 나서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끄는 선단은 그해 12월 영국을 출발했습니다.

세계를 도는 동안 그가 탐험만 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페루의 리마 인근 해역에서 스페인의 배 한 척을 나포했는데, 그 배에서 금 36kg과 은 2만6000kg, 금으로 된 십자가상, 각종 보석이 쏟아졌습니다. 1580년 9월 드레이크가 플리머스항에 닻을 내리자 런던은 온통 그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런던 주재 에스파냐 대사는 그를 “미지 세계의 도둑 왕”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드레이크의 세계일주로 제일 이득을 본 사람은 여왕이었습니다. 전리품(40만 파운드어치) 중 절반이 여왕 몫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당시 여왕의 일년치 수입보다 많은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드레이크는 1만 파운드를 받았다고 합니다.

튜더 왕조 시대 귀족 바로 아래 계급인 젠트리는 6000명 남짓(영국의 역사, 상, 나종일·송규범)이었다고 합니다. 젠트리는 다시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제일 상층에 젠트리의 1%도 안되는 기사(knight)가 있고, 이어 에스콰이어(esquire)와 젠틀먼(gentleman)등이 있었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해적왕이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탁월한 약탈 능력을 발휘한 드레이크는 이제 ‘기사’가 됐고, ‘경’이라 불리기 시작합니다. 해적은 신사가 됐고, ‘해외 비즈니스’의 길을 여는 주역이 됐으며, 대영제국 해군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제국은 이렇게 시작됐다

유럽이 ‘대항해시대’를 열었을 때 그 선두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1415년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모로코 지역의 세우타를 점령, 해외 영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포르투갈은 해양 탐험의 선구자인 ‘항해왕’ 엔리케 왕자의 주도로 아프리카 서안을 돌아 인도로 항해하는 바닷길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유럽인들이 이전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속속 진출했습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 인도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카스티야(이사벨 여왕)와 아라곤(페르난도 2세)의 통합으로 탄생한 에스파냐도 15세기 후반 본격적인 해외 개척에 돌입합니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고, 포르투갈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끈 탐험대는 1519년 8월 세비야를 출발, 세계를 한 바퀴 돈 뒤 1522년 9월에 세비야로 다시 돌아옵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은 대부분 스페인 차지였습니다. 포르투갈이 ‘무역’쪽에 관심이 컸던 반면, 에스파냐는 정복에 무게를 뒀습니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아즈텍 제국(멕시코)을 멸망시켰고, 1531년엔 코르테스와 친척간인 프란치스코 피사로가 180명의 군인과 말 27마리를 데리고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에스파냐는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은을 획득하게 됩니다.

아메리카와 인도, 동남아, 아프리카 등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후추와 계피 등 향신료, 금·은을 비롯한 귀금속, 노에 등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부가 넘쳐났습니다. 유럽은 부러운 눈으로 이 두 나라를 바라봤지요.

영국의 해양·무역 관련 활동은 튜더 왕조 시대에 기지개를 폅니다.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는 보조금까지 주면서 조선 산업을 육성했습니다. 최초로 보조금을 받은 캐닌지즈 조선소는 100여명의 목수·노동자를 고용해 총 3000톤의 선박을 만들었습니다. 1485년 의회는 처음으로 항해법을 제정했습니다. 헨리 8세는 유럽 최초로 왕실 소속의 상설 함대를 창설하고, 이를 관할하는 상설 부서를 만들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 때는 런던 상인들이 모로코와 기니아 등으로 무역로 개척에 나섰습니다.

남동생 에드워드 6세(재위기간 6년)와 언니 메리 1세(5년)에 이어 왕이 된 엘리자베스 1세 때에 이르러 해외 진출은 본격화됩니다. 젠트리 출신인 험프리 길버트와 월터 롤리, 리처드 그렌빌 등이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했습니다. 특히 롤리는 지금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도착, 이 땅을 처녀(virgin) 여왕에게 바치며 버지니아(virginia)라고 명명했습니다.

나중에 대박을 터뜨리는 식민지 개척보다 이 당시에 훨씬 활발하고 수지 남는 활동은 약탈과 노예무역이었습니다. 1560년대에 존 호킨스와 1570년대엔 드레이크가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습니다. 특히 드레이크의 활약은 에스파냐에겐 적잖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개신교와 카톨릭으로 갈라져 커져가던 영국과 에스파냐의 대립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영국 왕들은 한발 더 나아가 이들 해적들을 사략선(적선을 나포하는 면허를 가진 민간 무장선)의 선원으로 인가해 그들의 활동을 합법화했습니다. 물론 수익의 일정 부분도 받았구요.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였던 1585년에서 1604년까지 카리브해에서 에스파냐 선박들을 공격하기 위해 영국에서 출항한 배는 일년에 100~200척에 달했고, 이들이 가져온 부(富)는 한해 2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역사가들은 영국의 해적 활동을 대영제국의 맹아 또는 첫발로 평가합니다. 니얼 퍼거슨은 ‘제국’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영국인들은 최초의 제국 건설자들이 아니라 포르투갈, 에스파냐, 네덜란드, 프랑스 제국들의 찌꺼기를 찾아다니는 해적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영제국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즉 해상 폭력과 도둑질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다.”

◇무적함대의 허무한 참패

영국과 에스파냐의 격돌은 피할 수 없는 단계가 됩니다. 영국 해적의 약탈에 분노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1585년 네덜란드(당시 스페인령)에서 일어난 개신교 반란을 지원하자 더 이상 영국을 그대로 놔둬선 안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던 차 국내외 카톨릭의 후원을 등에 입고 호시탐탐 영국 왕위를 노리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메리 스튜어트(헨리 7세의 외증손녀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고종사촌의 딸)가 반역을 꾀하다 참수를 당합니다. 가톨릭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에스파냐의 영국 공격 결심은 굳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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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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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은 긴박하게 움직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로 네덜란드 남부를 평정한 파르마 공작이 이끄는 병력 3만명을 영국에 실어날라 엘리자베스 1세를 무너뜨리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영국은 에스파냐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1587년 4월 여왕의 명령을 받은 드레이크가 에스파냐 카디스항을 기습, 스페인 선박 30척을 박살냈습니다. 이때문에 무적함대 출항은 1년 이상 늦춰졌지요. 드레이크는 이때 “에스파냐 왕의 수염을 살짝 그슬린” 것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1588년 여름 영국해협 일대에서 벌어진 칼레 해전은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납니다. 위풍당당하게 출항했던 130척 중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배는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1만4000여명의 병사와 선원을 잃었고 생존자는 1만명 미만이었습니다. 반면, 영국의 손실은 배 7척, 사망자 100여명, 부상자 400여명에 그쳤습니다. 불과 17년 전인 레판토 해전(1571)에서 로마 교황의 연합 함대 일원으로 참전해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궤멸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무적함대의 명성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사실, 무적함대가 입은 손해 중 대부분은 전투 중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교전에서 잃은 배는 몇 척에 불과합니다. 대신 칼레 해전에서 패한 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크게 돌아 도망치는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개신교의 신풍(神風)’이라고 부르는 폭풍우 등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입니다.

중요한 건 전투 자체에서도 무적함대는 이미 영국 함대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는 점 입니다. 우선 대포 성능에 차이가 컸습니다. 16세기 초반 헨리 8세는 “지옥이라도 정복할 만큼 많은” 대포를 갖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무쇠 대포를 만들었습니다. 제작비는 무쇠 대포가 기존 청동 대포의 5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그 결과 칼레 해전에서 에스파냐 대포가 한 발을 쏠 때, 영국 대포는 세 발을 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총 사령관에 자신의 사촌인 하워드 경을, 부사령관에 해적 출신의 드레이크와 호킨스를 임명했습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영국 함대의 전술과 항해 능력은 상대를 압도했습니다. 영국의 배들은 속도가 빨랐고, 움직임도 민첩했습니다. 선원들은 매우 유능했습니다. 영국 함선들은 빠르게 움직이며 무적함대를 공격했지만, 해전 경험이 전혀 없는 37세의 귀족 출신 사령관이 지휘하는 무적함대는 느릿느릿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습니다.

당시 하워드 경은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서도 영국 해군보다 위대한 함대는 없을 것이다. 에스파냐 왕의 함대가 수백 척이라도 우리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능히 농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엘리자베스 1세 첫번째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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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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