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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미술의 세계

찰나에 취한 밤… 어둠은 순간을 더 선명하게 비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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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가울, 깊은, 밤

박진아 ‘문탠 04’

카메라로 일상의 풍경 포착

흐르는 시간 속 순간 잡아내

회화적 시점으로 다시 그려

전과 다른 물질·시간성 부여

엄유정 ‘밤 얼굴’

익숙한 대상 독특하게 관찰

가려진 면면 자연스레 발견

주변부에 펼쳐진 무한세계

특유의 선과 붓질로 담아내

세계일보

박진아, ‘문탠 04’(2007) 김상태가 촬영했다. 국제갤러리 제공


#문탠(moon tan), 밤에 받는 달빛

이번 가을에는 매일 아침 산책 나가던 공원을 밤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강아지와 나온 사람도, 배드민턴하는 가족도, 벤치에서 이야기 나누는 이들도 없는 시간. 그 시간의 공원에서 소란스러움은 고요함으로 변했고, 햇살을 대신해 달빛이 장소 전반을 비추었다. 달빛 아래 가만히 서 있으면 계절의 깊어짐이 느껴지며 나 또한 성숙해지는 것 같았다. 아침 산책만큼 밤 산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시작에는 박진아(1974~), 엄유정(1985~)의 작품이 있었다.

박진아는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이후 런던 첼시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성곡미술관, 국제갤러리, 합정지구, 하이트컬렉션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아르코미술관, 광주비엔날레 등 주요 미술 기관과 행사의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2010년에는 에르메스 재단이 후원하는 에르메스 미술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대구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박진아는 일상의 풍경들을 카메라로 포착한 이후에 그림을 그린다. 카메라를 사용하는 이유는 연출하지 않은 흐르는 시간 속의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서다. 그 대상은 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지 않는 시간에도 자기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집중한 사이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기도 특유의 표정을 짓기도 한다. 누군가의 시선 대신 자기 행동에 가장 집중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동작이 작가에겐 소중하다.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서 사진은 ‘전환의 상태’에 놓은 이미지를 포착하는 역할에 그친다. 그에게 회화는 재현보다 이미지와 물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순간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순간과 시차를 가진다. 그 시차는 그가 작가로서 회화적 시점으로 상황을 다시 보고 그리게 한다. 한 인물이 여러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나의 작품에 한 인물이 여러 번 나타나기도 하는 이유다. 무심코 지나칠 뻔한 찰나의 순간은 전과 다른 물질성과 시간성을 지닌 새로운 세계로 태어난다.

여기에 그러한 까만 밤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가로등 불빛도 보이지 않는 까맣기만 한 어둠. 그 안에서 잔디는 스스로 발광하는 듯 색을 낸다. 잔디 위에는 커다란 천이 돗자리처럼 깔려 있다. 천에는 생수와 음료가 담긴 플라스틱병과 흩어진 종이컵이 보인다. 종이컵만큼 재킷과 가방도 편하게 여기저기 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로 한 인물은 자유롭게 포즈를 취하며 앉아있다. 후드 티셔츠를 입은 인물 등이 주변을 둥글게 감싸며 거닌다. 마치 몽유(夢遊)와 같은 발걸음은 무언가에 취한 것 같다. 취한 대상은 바로 밤일 것이다.

‘문탠 04’(2007)은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인 2007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문탠은 말 그대로 달빛을 쬔다는 뜻으로 월광욕이라 번역할 수 있다. 작가는 어느 날 “달빛 좀 쬐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따라 한밤중 공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밤의 공원은 익숙하지 않은 장소이기에 낯선 곳을 방문하는 여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그 안에서 자리를 펴고 친구와 앉아 달빛을 받았던 청춘의 피크닉은 이렇게 회화가 되었다.

눈에 띄는 점은 공원 여행 당시와 다른 빛의 묘사다. 달빛을 즐기는 활동을 그렸지만, 정작 그림에서는 자연의 빛이 느껴지지 않는다. 까만 어둠을 배경으로 터트린 카메라 플래시 효과가 화면을 지배한다. 인공적 빛은 대상을 실제보다 선명하지만, 평면적으로 비추고 작가는 이를 붓질의 레이어로 만든 색면으로 그려냈다. 작가의 회화적 표현을 위한 방향 모색이 작품에서 온전히 보인다.

#밤에 보면 다르게 다가오는 얼굴

엄유정은 구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작업한다.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술, 디자인, 출판 등을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중이다.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소쇼, 공간 사일삼, 아이슬란드 리스투스 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신신(신해옥, 신동혁)이 디자인한 작가의 작품집 ‘푀유(FEUILLES)’는 올해 한국 책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공모전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엄유정은 일상 속 대상을 자기만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특유의 선과 붓질로 표현한다. 작품 화면 속에 식물, 사람, 그리고 롤케이크같이 익숙한 대상들이 등장하지만 포착된 그것의 형태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눈에 띄는 특징에 가려졌던 면면을 오랜 시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발견해 그렸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는 작업의 방식은 그리는 대상의 고유한 특성에 따라 결정한다. 선적인 특징이 두드러질 때는 연필 등을 사용하고 색을 드러낼 때는 아크릴이나 과슈를 사용한다. 대상과 작가의 호응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항상 예측 불가능하기에 새롭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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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유정 개인전 ‘밤-긋기’ 전시 장면.왼쪽 작품은 엄유정의 ‘밤 얼굴’(2021). 학고재 제공


작가는 이러한 작업에 관해 작가 노트에서 다음 같이 밝힌 바 있다. “일상적 삶에서 평범하고 중요치 않은 대상을 발굴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삶에서 놓치는 하나의 틈을 찾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주목하지 않은 것들, 지나가 버린 장면들, 소멸하는 대상들 내 삶의 주변부, 쓸모없지만 단단하고 아름다운 형상들 삶을 담담하게 구성하고 있는 것들. 그것을 스스로 관찰하고 배워가는 과정을 통해서 보는 이가 자신의 주변부에 펼쳐진 무한한 세계를 다시 보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작가에게 밤은 소중하고도 귀한 시간이자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밤이 되면 잠들어 있던 감각들이 깨어나고 그것이 경험하는 느낌이 증폭한다. 길에 나서면 소란스러운 낮의 시간에 경험하지 못했던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들리는 식이다. 거기에 반응하여 고개를 돌리면 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과 장면이 보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날 나무에 매달린 노란 잎, 그것이 떨어져 향하는 길.

‘밤 얼굴’(2021)은 작가가 종이에 과슈로 그린 작품이다. 칠흑이 교차하고 뭉개어지며 칠해진 검은 배경. 깊은 밤 시린 공기 또는 바람의 움직임이 붓이 오간 흔적으로 보이는 듯한 모습이다. 그 위에는 한 인물이 작은 얼굴과 비대한 몸으로 화면 전면을 차지했다. 이 인물은 자기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 가만히 자리 잡고 있다.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고개를 떨궈 두 손을 내려본다. 두 손을 보는 시선은 단순한 선으로 그려진 눈에서 비롯하는데 애틋한 감정이 전해진다. 어쩌면 밤이라서 더 잘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는 그의 속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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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유정의 ‘밤 얼굴’(2021).


작가는 이전부터 지속해서 인물 작업을 선보여왔다. 경험한 세계를 익명의 인물로 그려 상황을 새롭게 구성했다. 몸짓, 표정 등을 통해 구체적 대상이 아닌 어떤 상황을 표현하였다. 과거 작업에서도 인물은 마찬가지로 단색 배경에 간단히 그려진다. 다만 그때는 선이 얇고 명확했다면 이 작업에서는 선이 두껍고 때로는 흐려진다. 엄유정의 전시를 기획한 적 있는 박미란 큐레이터는 이를 두고 다음 같이 표현했다. “붓은 무겁지 않아서 더 특별한 어둠을 그린다. 메우기보다 긋는 움직임으로, 섬세한 잎맥을 따라가다 문득 먼 곳의 능선을 내다보는 그런 선으로서다.” 작품은 밤이 되면 형태는 어렴풋해지지만, 감정은 더 선명해지는 것을 알게 한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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